권영준 시인 / 고정관념에 대하여
1 아침에 일어나니 내 머릿속에 이상한 혹이 하나 만져졌다 굳은살처럼 딱딱하게 응고된 이 덩어리는 언제부터 내 생각 속에서 조금씩 돋아났던 것일까 망막의 유리문을 통해서만 간신히 보이는 그 덩어리의 뿌리, 뿌리가 하도 깊어 수술로도 제거할 수 없는 그것을 나는 맹장처럼 늘상 달고 다녔던 것이다.
2 생각하면 그것은 처음에 천평처럼 여리고 사납게 흔들리다 그 위태로운 흔들림이 한쪽으로 기울어 티눈처럼 돋아났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의 더께가 채곡채곡 쌓여 실핏줄이 뻗어 들어가고 생각이 담겨 내 몸의 장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팔처럼 뒤틀면 아프고 살갗처럼 꼬집으면 멍들고, 천연덕스레 남의 육체에 기생하며 땅 위의 온갖 흐린 눈빛들 틈새에서 난해한 잠언이 되어 선한 생각들을 송두리째 죽이기도 하는,
고등동물의 두뇌 속에서 아름답게 돋아난 뻔뻔한 나의 종유석.
권영준 시인 / 이번 생은 성공이다 그래, 오늘 하루는 잠들지 못하는 고단함조차 물푸레나무 수액처럼 싱그러운 날 저녁은 소리 없이 자박자박 나를 찾아와 깊은 바닷속으로 함몰되고 네 눈동자에 암각화처럼 새겨진 내 파리한 얼굴은 오늘 아침도 여전히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칡뿌리 같은 힘이다 가파른 어둠의 암벽을 거슬러 나의 흔들리는 영혼과 너의 반짝이는 눈빛이 만나 이 아침의 문을 열었으니 나의 품에 안긴 저 해를 오늘도 본다 누군가의 아침은 눈을 감는 일이고 누군가의 밤은 눈을 뜨는 일이고 살점을 헤는 바람도 떨림이더라 둥근 무덤의 이치란 백 년을 산 자의 하루와 하루를 산 자의 백 년이 만나 떠난 자의 허무만큼 애달픈 희망이 되는 것, 오늘도 하루의 일몰을 덮으며 날이 저문다 그래, 오늘도 이 하루를 살았다면 이번 생은 성공이다
권영준 시인 / 모든 고백은 묘비명이다
아내가 그 일을 고백했을 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네 우리의 밤이 오르가즘에 오르지 못한다고 고백했을 때보다, 이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태연한 얼굴로 고백했을 때보다, 난 무척 편안히 아내의 고백을 들었다네 창밖으로 난 외길에는 플라타너스 넓은 잎들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손뼉을 치고 있었고, 우리가 만든 치즈 같은 자식은 아직 세상 모른 채 잠을 자고 있었다네 그 날 아내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든 건 예정된 무너짐인 것처럼 감정의 전라를 연출했던 것이네 난 아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외면하였고, 몇 벌의 눈물을 훌훌 벗어버린 아내는 해맑은 웃음 한 조각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네 난 치명적인 독설의 화살에 꽂혀 내 깊숙한 상처들이 쓰라리게 타오르길 소망했지만, 아내의 고백으로 연해 나의 영혼은 고스란히 살아 남아 연옥의 껍질을 덮어쓰고 말았다네 그 날 플라타너스 잎들은 캄캄한 날에도 은비늘처럼 부서져 내렸고, 이제 난 완벽하게 해체되어 우주 속에 숨쉬는 모든 예정된 무너짐을 위하여 술잔을 들어야 한다네
모든 고백은 고백되는 순간 묘비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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