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푸른 뱀
수도 꼭지를 틀면 쏟아지는 물이 뱀이라는 생각... ... 팔당 어디 출렁이던 푸른 뱀이 여과지를 거쳐 여기저기로 달려와 수천수만 톤 쏟아진다는 사실 수돗물은 원죄로 똬리를 틀고 울던 날을 접고 참회의 뱀으로 우우 몰려와 쏟아지는 푸른 뱀인 것 뱀이 된 수돗물로 죄의 손을 씻으면 나도 누군가에게 흘러가 물뱀이든지 물이든지 그의 가문 가슴이나 텃밭을 적시고 아아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 팔당의 물을 푸른 뱀으로 바라보았다는 것, 팔당을 거쳐 온 푸른 뱀이 수도꼭지로 쏟아진다는 생각, 이 끊을 수 없는 연대로 나도 원죄의 뱀처럼 울어보는 것, 나도 이제 속일 수 없는 나이라는 것 수도꼭지를 트니 푸른 뱀이 쏟아진다. 제발 물의 독니를 세워 나를 단죄하기를, 나의 삶이란 숨 쉬는 것 빼고 다 거짓, 내게 독니를 박고 주렁주렁 매달려라. 푸른 뱀들아, 치명적인 독으로 몸부림치며 비로소 생명의 귀함을 깨우칠 테니 수도꼭지를 트니 금방 세면대에 푸른 뱀이 철철 넘쳐나, 팔당의 바람과 햇살과 새소리와 꽃 향기가 새겨진 비늘 반짝이는 푸른 뱀, 먼 곳을 흘러와 우우 쏟아지는, 때로는 내 생의 검은 등뼈를 서늘히 훑으며 쏟아지는 푸른 뱀
시집 『백석과 보낸 며칠간』(천년의사작, 2022) 수록
김왕노 시인 / 백석과 보낸 며칠간
백석 시에 빠져 백석과 보낸 며칠간 눈이 오고 토방의 질화로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으면 나도 아버지 탕약을 정성스레 끓이던 옛날 어머니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 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는' 백석의 외가라면 나는 사과꽃 환했던 함흥 내 외가를 떠올리는 것 내가 백석과 보낸 며칠간은 아나키스트도 공화국도 당국도 중앙도 없고 세상도 없고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밤에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를' 여우난골을 이야기하는 백석만 있는 것 백석과 보낸 며칠간 나는 백석의 나라에 훨훨 날아다니는 북방 나비도 되고 북방 여치같이 인중 긴 얼굴로 객잔에 앉았거나 청배 파는 메기 꼬리같이 수염이 난 노인을 오래 생각하고
백석과 보낸 며칠간 가난한 내 영혼에서 볍씨 같이 싹 트던 맑은 눈
시집 『백석과 보낸 며칠간』(천년의사작, 2022)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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