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집 시인 / 오렌지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신동집 시인 / 하일명상(夏日瞑想)
노년은 하잘없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이런 말을 하던가 손뼉 치며 소리 높이 허리 굽은 남루를 찬양하라 격조 높은 정밀(靜謐)의 이마 푸른 현자도 때로는 느닷없는 광기에 사로잡히며 스스로의 운명을 이룩하는 수가 있다 묵묵히 돌아도 안 보고
명심하라. 헤매이며 떠돌던 노한 노년도 비로소 냉엄히 끓는 눈을 부릅뜬다 이승을 엿본 자 무슨 한이리오 떠나며 가벼이 코나 풀 일 더위도 바야흐로 막바지 8월 귀뚜리도 엊그제 울기 시작했다 꿀벌이여, 제비 나는 빈 집에 와 집을 지어라 황망히 살다 갈 집을 지어라
신동집 시인 / 오, 하나씩의 이름들
오, 하나씩의 이름들 무시로 떠오르는 하나씩의 이름들 돌이며 길, 들이며 강 풀이며 나무, 별이며 무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름들
이들은 결국 하나씩의 암호였던가 우리들의 삶의 융단천 그 둘레 안으로 누구인가 짜 넣은 암호였던가
우리는 저마다의 암호를 안고 이 지상을 살다 가는 것이리라 조금씩은 나름으로 풀다 말다 하면서 그러나 결코 풀지 못하며, 그리곤 다시 한 번 풀기 위하여 깨어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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