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문호 시인 / 기러기
저 새들은 어디서 오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세상 저 끝에서 온다고 말해주었다.
저렇게 떼지어 어디 가는 거냐고 또 물었다 세상 저 끝으로 간다고 말해주었다.
그럼 어디가 세상 끝이냐고, 이번엔 정색하고 올려다 본다 잠깐 궁리 끝, 기러기 내려앉는 곳이겠지, 하고 둘러 댔다.
호숫가 외딴 오두막 가까이 키보다 높은 갈대들 손 저어 쉬어 가라고 기러기 부르는 곳 저녁 막 먹고 나란히 서서 고개 젖혀 하늘 보며 밭고랑에 오줌발 쏘던 깊은 겨울.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유문호 시인 / 길들이 뒤척거렸다
길들이 뒤척거렸다 바람 불어 마른 길들이 밤새 나를 찔렀다 가만히 길 하나 주워들자 썩은 나무등걸처럼 툭 부러졌다 먼지처럼 날리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걸음들 먹먹한 표정으로 서서 나는 내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잘못들이여 내가 키워온 길들이여 밤새 뒤척거린 어둠을 걸어 나는 가련다 뼈아픈 절망들이 모여 싱긋씽긋, 아침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다
유문호 시인 / 거미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올 것이다
이윽고 파닥거림 뜸해지고 그쯤에서 거미는 궁리를 마쳤던가 슬슬 잠자리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 굽혀. 거미줄 아래 오솔길 따라 채 해결 안된 사람의 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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