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우 시인 / 봄밤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 집엔 도둑이 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 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이면우 시인 / 버스 잠깐 신호등에 걸리다
큼직한 손바닥에 상추 펼치고 깻잎 겹쳐 그 위에 잘 익은 살코기 얹고 마늘 된장 쌈 싸 한입 가득 우물대는 사내 보는 일 그것참 흐뭇하오 맑은 술 한잔 약봉지 털듯 톡 털어 넣고 마주 앉은 이에게 잔 건네며 껄껄대는 사내 보는 일 역시 흐뭇하오 그 곁에 젊은 여자, 호 불어 넣어 준 제 아이 오물대는 입을 그윽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소.
유리벽 이쪽에서 나도 저리 해보리라 마음먹은 저녁은
신호등 떨어진 네거리처럼 무수히 흘러갔소.
이면우 시인 / 밤 벚꽃
젊은 남녀 나란히 앉은 저 벤치, 밤 벚꽃 떨어진다 떨어지는 일에 취한 듯 닥치는 대로 때리며 떨어진다 가로등 아래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지금 천년을 기다려 오소소 소름 돋는 바로 지금
몸을 때리고 마음을 때려, 문득 진저리치며 어깨를 끌어안도록 천년을 건너온 매질처럼 소리 안 나게 밤 벚꽃 떨어진다.
이면우 시인 / 십오 초
다리 저 끝 검정 우산 점점 커지며 세찬 물소리에 싸여 가늘고 길게 애조 띤 노래도 함께 다가왔다 마주 스치는 십오 초 목소리 주인은 차마 보지 못했다 난간 바로 아래 갈길 바쁜 맑은 물살이 듣는 몸 안쪽 살짝 돌아가는 서늘함 페달 부려 힘껏 구르는 비옷 안 마음은 그것이 다만, 슬픔에 짓눌린 신음이 아니길 지금이 울어야 할 꼭 그때라면 다가오는 사랑의 예감 때문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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