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책형’, 1938년, 캔버스에 유채, 155×140cm,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에펠탑의 신랑 신부’, 1938-39년, 캔버스에 유채, 145×148cm, 프랑스 파리 퐁피두 현대미술관.
‘에덴의 동산’, 1978년, 스테인드글라스, 독일 마인츠 성 스테판 성당.
샤갈의 환상적인 꿈의 세계 / 박혜원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났고, 이 세상은 거대한 사막이고 그 안에서 내 영혼은 횃불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오래 전부터 간직한 꿈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들을 그렸다. 나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을 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영적인 깨달음과 종교적인 감정,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이 그림들을 이 미술관에 걸어두고 싶다. (중략)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한 것이므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사랑과 희망의 색깔로 인생을 채색해 나가야 한다. 이런 사랑 안에 삶의 사회적 논리와 모든 종교의 핵심 내용이 들어있다. 나에게 예술과 인생의 완벽함은 성경으로부터 유래한다. 성경을 근원으로 한 이런 정신적인 부분이 없다면 인생에서나 예술에서 논리적인 구조나 형태의 구성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인생과 마찬가지로 예술에서도 사랑이 바탕이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는 1973년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년)이 니스 국립 샤갈 성서 메시지 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자신의 작품 증서에 쓴 인사말로, 그의 진지한 작가정신을 잘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적인 참상을 겪은 유럽의 예술가들은, 참혹한 전쟁의 실상과 잔혹한 인간성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느끼게 되었고, 크게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우선 독일 중심으로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표현주의’, 그리고 또 하나는 직면한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은신처를 찾는 ‘환상적’인 작품을 들 수 있다. 여기 소개하는 유다계 러시아 화가 마르크 샤갈은 바로 이 두 번째 길을 선택한 화가로, 아득하고 몽롱한 꿈속에서 펼쳐지는 듯 보이는 그의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회화 언어는 관객을 아름다운 꿈속으로 인도한다.
그의 회화 속 생명체는 더 이상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듯 대기 속에서 자유로이 부유한다. 이같이 이성적 해석의 틀에서 자유로워진 그의 작품 속에는 그의 고향인 러시아의 작은 시골 마을, 비테브스크의 추억, 꿈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있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그는, 20대 초반인 1910년 고향을 떠나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는 파리에서 시인이자 예술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년)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샤갈의 작품을 일컬어 ‘초자연적’이라 칭하면서 미술계에 등장할 ‘초현실주의’를 예고한다.
그는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몽마르트르의 ‘라 뤼쉬’(‘벌집’이란 의미로, 작은 아파트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여서 붙여진 명칭)에 정착하여 이탈리아인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년), 루마니아에서 온 샤임 수틴(1894-1943년), 프랑스의 페르낭 레제(1881-1955년) 등의 화가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는 파리에서 유행한 입체주의 또는 초현실주의 화풍과 정신에 영향을 받아 작업하였고 이를 기초로 한 독창적인 양식을 구축해 낸다.
유다인으로서 강한 자부심과 명예를 가진 그에게는, 수천 년 동안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자손대대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온갖 핍박을 받으며 살아온 유다인의 한과 애환, 그러면서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강인한 유다 민족의 정신이 느껴진다.
유다교인으로서 깊은 신앙심을 가진 그에게 성경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주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 메츠, 샤르트르, 렝스, 독일의 마인츠, 예루살렘 의학 센터 내 유다인 예배당 등 많은 유럽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는데, 이는 그가 염원한 천상의 영원성과 신비를 나타내기에 절묘한 표현이었다. 특히 그가 즐겨 사용한 짙푸른 배경의 아름다움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독일의 마인츠 성당 내부는 온통 샤갈의 환상적인 푸른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 차있다. 그 가운데 구약의 ‘에덴의 동산’을 주제로 한 것이 있다. 에덴 동산의 평화로운 지상낙원은 풍요롭게 우거진 지상의 녹색 나무와 천상의 푸름으로 한데 뒤엉켜 하나가 되었고, 푸른 하늘의 환히 빛나는 태양 아래에는 날개를 단 천사가, 그 아래에는 나체의 아담과 하와가 사랑 가득한 눈으로 마주보며 사랑을 속삭인다. 이들 주위에는 수탉, 염소 그리고 뱀 등의 야수들이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얀 책형’은 히틀러가 등극하여 나치의 잔혹함이 한창이던 1938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하늘로부터 구원의 흰 빛을 받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역시 결백을 상징하는 듯 흰 십자가에 달려있고 허리에는 유다인들이 두르는 천을 두른 모습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동시에 유다인들의 예언자의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는 나치의 병사가 유다교 예배당을 부수며 불태우고 있고, 그 아래에 자루를 들고 탈출하는 남자, 그리고 바닥에는 유다인들이 공경하는 두루마리 모양의 토라(모세오경)가 내동댕이쳐져 불타고 있다.
고개를 떨어뜨린 예수님 위에는 슬피 흐느끼는 유다인들, 붉은 깃발을 들고 진격하는 러시아의 붉은 부대, 불타버린 마을과 배를 타고 희망을 찾아 피난 가는 유다 민족이, 그리고 그 아래에는 토라를 가슴에 소중히 품은 남자의 모습 등 전 유럽을 휩쓴 붉은 부대와 나치의 유다인 탄압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화려하고 밝은 샤갈의 팔레트와 달리 무채색의 경건함과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이 그림에서는, 그의 깊은 민족주의와 전쟁의 비극을 진지하게 담아내고 있다.
‘에펠탑의 신랑 신부’는 위의 작품과 같은 시기에 그려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은 분위기의 그림으로, 여기서는 파리에서의 행복하고 안정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화면 중앙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신부와 그녀를 안고 있는 신랑이 수탉을 타고 하늘을 나는 듯, 초현실적으로 그려졌다. 이들 오른쪽에는 푸른 나무 한 그루가 그 아래 꿈속의 한 장면같이 자리 잡은 고향 비테브스크를 향해 날고 있고, 나무 위에는 한 손에 편지를 든 남자가 등장하고, 그 아래에는 하체는 바이올린, 그리고 상체는 염소의 모습을 한 동물이 한 손에 활을 들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환상적이고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옆으로는 파리의 에펠탑이 푸른빛으로 우뚝 서있고 그 옆의 강렬하고 노랗게 이글거리는 태양 빛에 한 쪽 날개가 물든 듯 보이는 천사가 손에 꽃다발을 들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태양 아래에는 행복한 신랑 신부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지는데, 이는 샤갈의 평생 연인이자 아내인 벨라와 행복한 결혼을 추억하며 그린 행복의 찬가이다. 원을 그리며 환희의 춤을 추듯 펼쳐지는 화면 구성이 인상적인데, 비스듬히 누운 듯 부유하는 행복한 한 쌍, 수탉 몸 위에 자리 잡고 앉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천사, 그 옆으로 초를 든 천사의 움직임은 오른쪽의 나무로 이어져 염소 - 바이올린과 꽃다발든 천사에게로 연결되고 이 행복에 겨운 춤은 마치 영원히 계속될 듯 흥겹다.
“삶에 대해 가장 심오하게 이해하고, 삶의 신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라고 평한, 전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레마리의 감상이 깊은 공감을 준다.
박혜원 소피아 - 화가. 벨기에 브뤼셀 리브르 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 판화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한양여대, 상명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2003년 평화방송 ‘함께 보는 교회미술’을 진행했으며, 최근 “매혹과 영성의 미술관”과 “그림 속 음악산책”(생각의 나무)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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