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는 예레미야’, 1630년, 패널에 유채, 58×46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익스 미술관.
‘성경을 읽는 예언자 한나’, 1631년, 패널에 유채, 59.8×47.7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익스 미술관.
‘아담과 하와’, 1638년, 동판화, 16.2×11.6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렘브란트하우스.
‘아브라함의 희생’, 1655년, 동판화, 15.6×13.1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렘브란트하우스.
빛과 암흑의 마술사, 렘브란트 박혜원
서양미술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힐 정도로 독창적이면서 본질적인 표현을 추구한 거장,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년)는 역시 대가인 루벤스(1577-1640년)와 함께 17세기 플랑드르 미술을 대표하는 바로크 화가로 손꼽힌다.
바로크 미술은 어두운 배경에 묻혀있는 주인공 또는 사물에게 강렬한 조명을 비추어 극적인 효과를 연출,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감정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표현으로, 이 드라마틱한 효과를 키아로스쿠로(명암법) 기법이라 한다. 특히 ‘빛과 암흑의 마술사’라 불린 렘브란트는 마치 암흑 속에 묻혀있는 인물이 빛을 받아 서서히 관객 앞으로 다가오는 듯한 신비로운 표현을 연출하기로 유명하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렘브란트에게 공간을 암시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성격의 깊이를 나타내고 종교적 경험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그는 시각세계의 만질 수 없는 상징들 곧 빛, 공기, 그늘을 사용하여 마음과 영혼의 미스터리를 환기시키고자 하였다.”라고 미술사가인 월러스가 기술한 것은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섬유 산업도시인 레이덴 태생인 그는 제분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 비교적 안락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모친의 영향으로 라틴학교에 입학, 라틴어, 네덜란드어 등 고전언어와 성경을 접하는 등 탄탄한 인문학적 기초를 닦았다. 24세에는 수도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여, 작업실을 운영하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며 화가로 명성을 쌓기 시작하였고, 그의 영원한 뮤즈인 아내 사스키아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그가 그토록 사랑한 사스키아가 아들 티투스만 남기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는 그의 끊임없는 정신적 방황의 시작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인 ‘예루살렘의 파괴를 슬퍼하는 예레미야’는 대담하면서도 섬세한 세부 묘사와 깊이 있는 심리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렘브란트 특유의 어두운 배경 중앙에는 마치 노인에게서 발광하는 듯한 은은하면서도 환한 빛에 비추이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두꺼운 성경 위에 온몸의 무게를 실은 듯 팔을 괴고 고심하는 모습으로 있다.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한 예레미야는 기원전 58년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의 광경을 후경의 아치형 동굴 너머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모습으로 상상하여 그려내고 있다. 동양풍의 화려하고 기품 있는 짙은 자주빛 가운을 입고, 백발에 흰 턱수염이 무성한 예레미야 옆에는 성경이, 그리고 바로크 양식의 황금 수반(水盤) 안에는 금전과 제례 용기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는 금색 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양탄자 위에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괴로워하고 있다. 먼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이의 고뇌하는 모습이자 회개하지 않고 신성모독과 방탕한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혜로운 이의 비탄하는 모습이 중후하면서도 극적으로 다가온다.
‘성경을 읽는 예언자 한나’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삼았다. 한나는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갔을 때 성전에서 이들을 맞이한 예언자로, 그녀는 아기 예수가 메시아임을 알고 기다린 84세의 과부이다(루카 2,36-37 참조). 역시 어두운 배경 중앙에는 내면으로부터 배어나오는 듯한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빛이 성경 위에 비치고, 은은한 빛에 비추인 한나에게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파의 길고 고된 세월과 깊은 신심이 느껴진다.
히브리어로 적힌 성경을 활짝 펼치고 잔뜩 주름진 손을 올려 읽어 내려가는 노파의 모습에서는 깊은 신앙심과 열정이 은은하게 배어나와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렘브란트는 자화상, 초상화, 풍경화 등의 다양한 주제로 작업하였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주된 관심사는 ‘성경’이었다. 그는 평생 유화 650여 점 가운데 145점, 그리고 300여 점의 동판화(에칭, 흑백의 강한 대비로 그래픽한 표현이 특징이다.) 가운데 70점을 주제로 다룰 만큼 성경은 그를 지배한 주제이다.
그는 성경 말씀을 형상화하는 것을 하느님이 그에게 주신 인생의 과제이자 소명으로 여겼고, 한평생 성경을 주제로 작업하면서 하느님의 신비와 사랑을 발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상인, 귀족의 초상화를 즐겨 그리던 당시 분위기에서 과감히 누더기를 걸친 보잘것없는 걸인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동판화로 담아낸 진정한 휴머니스트이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인간의 본질적이고 진실된 모습을 찾은 그는 휴머니스트이자 철학자이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서 ‘가난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한 그에게 성경은 실존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그가 성경을 주제로 그린 동판화 가운데 ‘아담과 하와’라는 작품에서는 괴물 형상의 뱀이 기어오르는 나무 아래 선악과를 든 하와가 그녀의 연인인 아담에게 선악과를 건네며 유혹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섬세한 선의 표현이 돋보이는 이 동판화에서 하와는 이상적 고전미를 가진 여인이 아니라 인간미 넘치는 소탈한 모습으로 조심스레 선악과를 건네고 있고, 아담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남자로 그려졌다. 렘브란트가 그려낸 최초의 남녀는 이같이 어수룩하고 친근감 넘치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
또 다른 동판화인 ‘아브라함의 희생’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산에 올라 하느님께 희생물로 바치려는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긴급히 아브라함의 손목을 잡아 저지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오른쪽의 눈부신 하늘에서 막 날아 내려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천사는 생기가 넘치고 차마 이 끔찍한 장면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사악의 눈을 가리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는 깊은 부정이 느껴진다.
렘브란트는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하려면 명예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외친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 신앙을 토대로 다른 이들의 눈에는 괴팍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이었지만 고집스럽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갔다.
또한 점차적으로 그는 고객의 취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비추어 아름답고 진실한 이미지만을 찾아가는 외롭고 좁은 길을 선택하여 고독하고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몇 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그림이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의 그림이 분명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 사스키아를 잃고, 가난과 고독 속에서 허덕이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암흑 속에 묻혀있는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을 외부로 끌어내는 데 이르렀다.
가장 순수한 상태의 빛은 천상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고통 받는 이들에게 던져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박혜원 소피아 - 화가. 벨기에 브뤼셀 리브르 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브뤼셀 왕립 미술학교 판화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했다. 인천 가톨릭 대학교, 한양여대, 상명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2003년 평화방송 ‘함께 보는 교회미술’을 진행했으며, 최근 “매혹과 영성의 미술관”과 “그림 속 음악산책”(생각의 나무)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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