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 피터 브뤼겔 (1568년, 캔버스 위에 유채, 86x156cm, 나폴리 카포 디 몬테 국립미술관)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피터 브뤼겔(Bruegel the Elder, Pieter, 1525-1569년)이 살았던 16세기의 네덜란드는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국가였다.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는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기에 네덜란드 국민들은 모진 탄압을 감내해야 했다. 특히 카알 5세 때에는 무서운 학정의 고통이 극에 달하게 된다. 이런 암울하고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속을 툭 터놓고 말하거나 세태를 비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속담이나 풍자를 통해 진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칼을 갈았으며, 부끄러운 역사와 말 못할 진실을 담아냈다. 당시 부패한 지도자들을 풍자하면서 도덕적 해이를 우의적으로 묘사하고, 역사의 엄중한 교훈을 전하며 상처받은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표현한 화가가 피터 브뤼겔이다.
성서의 마태오 복음 15장 13-14절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하자 이에 예수가 눈먼 길잡이를 통해 비유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나무는 모두 뽑힐 것이다. …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두 다 구렁에 빠진다.” 브뤼겔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그림은 바로 이런 성서의 내용을 묘사한 일종의 우화이다.
브뤼겔의 그림 복판에는 여섯 명의 소경이 나온다. 이들은 벙거지에 망토를 걸친 것이 순례자와 나그네 모습을 한 걸인들로 각자 상대방의 지팡이와 어깨에 의지한 채 위태한 걸음으로 세상의 무대를 건너고 있다. 아마도 동네에 나가 주린 배를 채우고 보이지 않는 앞을 휘저으며 희희낙락 거처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 앞에 놓인 길은 그다지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닌 도랑 옆의 험하고 좁은 길이다. 특히 이 연쇄의 행렬은 해골들이 서로의 뼈를 맞잡고 진행하는 죽음의 행렬로 보인다.
드디어 도랑을 끼고 앞서 인도하던 소경이 먼저 벌렁 나자빠지며 웅덩이에 빠진다. 그 바람에 애지중지하던 악기가 박살나 버렸다. 그 뒤를 따르던 둘째 소경이 앞사람의 지팡이를 놓치며 균형을 잃는다. 눈두덩이 움푹한 것이 누군가 이 자의 눈을 후볐다. 무언가 죗값을 치른 것이다. 세 번째 소경은 넘어지는 앞 소경의 지팡이를 놓치지 않으려 당황한다. 다리가 이미 꼬이지 않았는가. 눈의 흰자위가 뒤집어진 것이 흑내장이다. 네 번째 소경의 눈은 각막백반이다. 이자는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앞에 닥칠 일을 모르는 것은 다섯째와 여섯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끝 떨어진 염주알처럼 줄줄이 구렁 속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성서에서 소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고 맹목적 신앙행위를 일삼는 무지한 자들이다. 무지와 거짓은 둘 다 큰 죄악으로 모두 지옥행이다. 이들이 처박히는 구렁은 맹목과 무지, 거짓으로 범벅이 된 악의 소굴이 아니겠는가?
세 번째 장님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림 복판의 교회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교회는 높은 첨탑의 위용을 지녔지만 어리석음에 실족한 이들을 구원하기는커녕 이 죽음의 행렬을 응시하고 있다. 이들이 든 지팡이가 예언자의 지팡이처럼 보이니, 침묵의 교회는 무지와 거짓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 아닌가?
성서에서 죄인인 소경은 세상살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슬기’의 반대인 ‘어리석음’이다. 이런 어리석은 자를 믿고 따른다면 어찌 되겠는가. 틀림없이 구렁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어리석음을 좇으면 어찌 되는지를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브뤼겔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위험하고 비극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내려고 소경들의 머리끝과 지팡이들을 연결하는 하강의 직선, 곧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떨어지는 사선을 도입하고 있다. 이 사선이 ‘넘어짐’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이 사선의 동세는 지평선이 그리는 직선, 곧 수평선과 대비되면서 그 추락의 강도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브뤼겔이 소경들을 길게 펼쳐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고 지평선을 높이 끌어올린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림 왼쪽 아래 귀퉁이에는 마른 관목 한 그루가 도랑을 타고 있다. 달린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이 나무는 ‘플루토의 나무’로 기독교 도상(圖像)에서 ‘사망의 나무’이다. 반대편 오른쪽 귀퉁이 개울가에는 풀꽃이 한 송이 피어올라 있다. 붓꽃이다. 기독교 미술에서 붓꽃은 꽃잎이 칼날처럼 생겼다 해서 ‘덕목’을 의미한다. 구렁에 빠진 첫째 소경이 팔을 뻗어 붓꽃을 잡고자 한다. 바로 죽음의 순간에 바라는 구원의 손길이다.
흰 고깔을 쓴 둘째 소경은 그림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아마도 우리와 눈길을 마주치며 이 어리석음과 죽음의 행렬에 동참하라고 권유하는 것 같다. 현세의 욕망에 눈먼 자들이 이 대열에 낄 것이다.
이 그림은 하느님 말씀만이 참다운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 이외에는 어리석은 자는 절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로 섭정기 네덜란드의 암담한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맹목적인 아첨꾼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동시에 브뤼겔은 이런 우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당시 힘든 현실을 사는 자국민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넘어진 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슬기로움의 덕목이 다시 한번 생각난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예술사 석사와 D.E.A. 과정을 마쳤으며, 파리 3대학교(Sorbonne Nouvelle)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샤갈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아폴리네르의 조각비평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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