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 미켈란젤로 (1498-1499년, 대리석, 이탈리아 로마, 베드로 대성당 입구)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오늘 우리는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년)의 피에타(Pieta)를 감상하고자 한다. 이 작품의 주안점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이 하느님의 계시이며 섭리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인간이 오기 전에는 아름답고 완전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되찾으려면 살아생전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돌을 깨고 가는 자신의 작업이 단순히 어떤 형상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미리 돌 속에 새겨놓은 형상을 드러내고자 그 나머지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그의 예술 작품은 하느님의 세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믿음 속에서 미켈란젤로는 주로 인간의 육체를 표현하였다. 그가 표현한 인간의 모습은 결코 추하고 경박한 일상의 모습이 아니라, 이상적 육체, 곧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런 그의 예술관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 ‘피에타’이다. ‘피에타’란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픔에 휩싸인 작품을 말한다.
이 작품에서 놀라운 것은 모든 형태가 지극히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마리아의 미사포, 앞가슴에 두른 띠와 옷 주름, 목 아래의 잔잔한 주름 효과, 퍼진 넓은 치마 주름 등 이 모든 것이 차가운 대리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형상들이다.
또한 두 인물의 균형과 조화 또한 완벽하다. 성모 마리아의 숙인 머리와 어깨의 넓이, 예수의 젖혀진 머리와 조화를 이룬 전체적인 신체 균형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참으로 편하게 한다. 바로 예술에서의 균형과 조화, 통일감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이런 형태의 사실성은 미켈란젤로의 해부학에 대한 지식과 재능에 근거한 것이다. 해부학이란 신체를 이루는 근육과 뼈 등 골격과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체 내부의 생김새를 알아야만 머리와 가슴, 배와 다리의 생김새, 신체 각 부분의 근육과 골격 등 인체의 겉모습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신체의 비례 역시 해부학의 한 요소이다. 머리의 크기와 몸의 크기가 어울려야 하며, 목의 길이와 어깨의 넓이, 팔과 다리의 길이 등 신체의 비율이 적절할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부학에 입각한 사실적 이미지 이외에도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이 마리아와 예수가 합쳐진 삼각형 모양이다. 이 모양은 시각적으로 가장 안정된 것인데, 보는 이는 아무런 어색함도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은 오로지 슬프고 측은한 마리아의 심정만 느낄 뿐이며, 이로써 마리아와 보는 이의 완전한 심리적 공감이 이루어지게 된다.
바로 그 지극한 슬픔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형상이 아래, 곧 땅을 향하고 있다.
마리아의 머리, 손과 팔을 비롯해 예수의 머리와 팔, 다리 등 모든 것이 아내를 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마리아의 슬픔은 더욱 측은하게 보인다. 그 슬픔은 아들을 잃은 한 어미의 슬픔으로, 아마 아들을 죽음으로 인도한 하늘을 원망하기에 애써 하늘을 외면하는 듯하다.
이처럼 마리아의 슬픔은 지상의 슬픔, 한 인간의 슬픔이기에 우리의 가슴 더욱 깊이 박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드러난’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예수의 오른팔을 괴고 있는 마리아의 손을 보라. 모든 것이 아래를 향하는 데 반해 이 손만이 처진 예수의 몸을 지탱하려고 위를 향한다. 마치 죽은 아들을 하느님께 보내는 마리아의 경건한 마음을 암시하는 듯한 이 은밀한 선이 이 작품에 실제의 생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컴퍼스의 중심점이라 생각하고 원을 그린다면, 예수의 머리와 마리아의 머리, 어깨, 손 그리고 예수의 무릎과 발이 이루는 형상은 거의 반원이다. 그 중심점에서 발산되는 힘은 반원의 내부에 마치 방사선 모양의 태양빛이 퍼지는 듯하다.
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완전함이다. 흔히 성화(聖畵)에서 원은 하느님의 세계이며, 사각형은 지상으로 표현된다. 바로 무한과 유한의 표현인 셈이다. 이 작품은 아직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반원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반원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완전함에 도달할 것이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인간이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과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반원이지만 그 안은 빛으로 가득 차있다.
그 빛 속에 놓인 예수의 몸을 보라. 오랜 시간 시련을 겪은 추하고 상처투성이의 죽은 시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고 완벽하며 따스한 체온을 지닌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인간 육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물결모양 곧 에스(S)자 곡선을 이룬다. 따라서 이 예수의 죽음은 오히려 삶이요 생명이다. 이승의 목숨은 끊겼지만, 새로운 정신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지상에서보다도 더욱 완벽하고 영원한 삶, 즉 천상의 삶이 열린 것이다.
이 반원의 나머지는 우리 각자가 채워야 할 자신의 몫이다. 바로 열정적인 믿음과 기도가 나머지 반을 채울 것임을 미켈란젤로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 주어진 새 삶을 알기에 마리아의 슬픔은 매우 절제되어 있으며 깊은 명상과 기도로 나타나 있다.
그 밖에도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 두 사람이 보이는 상대적 젊음이다. 이제 수염이 막 돋기 시작한 청년 예수를 비롯한 두 사람은 모자간이라기보다는 오누이로 보인다.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 자신은 “여느 여인도 하느님을 경배하며 순수하고 정결하게 살면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거늘 하물며 마리아야 얼마나 젊게 보였겠는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여러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재능과 기교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 속에 작가가 새겨놓은 은밀한 상징성이다. 이 상징성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느님 말씀처럼 믿음을 통해 ‘느껴야 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바로 이 느껴야 하는 하느님의 세계를 세련된 기교의 뒤편에 숨겨놓음으로써 신성한 종교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보이는 삶이 아닌 조용한 기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느끼게 된다.
마리아의 가슴에 두른 띠에 새겨진 ‘조각가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보아 이 작품을 만든 자신에게 스스로 긍지와 자부심을 부여한 미켈란젤로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예술사 석사와 D.E.A. 과정을 마쳤으며, 파리 3대학교(Sorbonne Nouvelle)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샤갈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아폴리네르의 조각비평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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