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의 눈물 / 조르주 드 라 투르 1645년, 캔버스 위에 유채, 114cm x 95cm,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한나 재단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우리는 한평생 살아가면서 많은 눈물을 흘린다. 어린아이가 보채는 눈물에서부터 남몰래 흘려야 하는 마음의 눈물도 있으며, 슬픈 감정의 눈물과 기쁨의 눈물도 있다. 인간이 흘리는 이런 눈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눈물은 무엇일까? 얼마 전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의 눈물’도 존재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통한과 회개의 눈물, 신앙과 반성과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겠다는 마음의 약조에서 흐르는 눈물이 아닐까? 그리고 예술사상 이런 내면의 눈물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 조르주 드 라 투르(1593-1652년)가 그린 베드로의 참회의 눈물, 곧 ‘성 베드로의 눈물’에 그려진 그 눈물일 것이다.
조르주 드 라 투르는 17세기 전반에 활약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30여 점으로, 그 가운데 화가가 직접 사인한 작품은 두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화가의 전기와 후기 경향이 얼마나 다른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전기의 작품은, 스탕달이 ‘빈자들의 예술’이라고 평한 것처럼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서민들의 어수선한 생활상을 주된 소재로 삼았으나, 후기의 작품들은 그와 달리 예수와 연관된 사람들의 인간적인 변화, 곧 회개와 성찰에 관한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그의 후기 그림은 중세의 교권주의적 태도가 전혀 배어나지 않은, 정적이고 차분하며 소박한 필치를 통해 보는 이를 명상과 사유의 길로 들게 한다. 그런 만큼 초기의 그림을 ‘낮 그림(day pieces)’으로, 후기의 그림은 ‘밤 그림(night pieces)’으로 칭한다. 특히 그의 밤 그림은 당시 웅장한 배경이나 화려하고 풍요한 장식, 과장된 표현과 율동미 등 동적 표현을 위주로 한 당시의 바로크 화풍과는 전혀 다른 구성을 보인다. 곧 이 시기 그의 대부분 작품들은 어둠을 배경으로 가냘픈 촛불을 드리우고 있는데, 이런 강한 명암대비를 통해 한 인물의 깊은 명상이나 잔잔한 회한 등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을 진솔하고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다.
드 라 투르의 이런 후기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 베드로의 눈물’인데, 예수님을 부정하고 난 뒤 참회와 통회의 눈물을 짓고 있는 한 가련하고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런 인간적 나약함이라는 현상과는 다른, 신앙의 무게감이 드러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조용한 실내를 비추는 촛불이 베드로의 어두운 영혼을 밝히면서, 복음 안에서 회개하고 거듭난 한 인간의 숙연함, 인간 베드로가 흘리는 통한의 눈물과 참회의 회개가 은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탉과 촛불이 들어있는 등(燈)을 비롯한 단출한 오브제들이 보인다. 특히 베드로 정면의 윗부분, 그 어둠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담쟁이 넝쿨이 좀 흐리고 어색한 모습으로 보인다. 담쟁이 넝쿨은 르네상스 이래 거장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마르지 않는 본래의 성질로 인해 영생과 장수를 의미하였다. 그리스도교 회화의 도상으로는 질기고 강한 성질 때문에 변치 않는 견고한 신앙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그림 속의 담쟁이 넝쿨은 허공에 매달린 모습에 말라 비틀어져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약해진 신앙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 아래 탁자 위에는 커다란 수탉이 놓여있다. 수탉은 그리스도교에서 통상 베드로의 상징으로 간주되는데, 그 울음소리가 카야파의 법정에서 베드로가 행한 배신을 일깨운다는 의미 때문이다. 성경에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는데, 바로 이 그림에서 베드로의 늙고 나약한 모습에도 그의 초롱초롱 빛나는 동그란 눈이 그 말씀을 기억해 내곤 소스라치게 놀라는 순간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변함없는 신앙심을 알리는 수탉은 상대적으로 전혀 흐트러짐 없이 위세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담쟁이 넝쿨과 수탉 아래로 촛불이 든 등이 놓여있다. 이 촛불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촛불이 겉으로 드러나지 못한 채 등 안에 감추인 것은 주님께서 붙잡혀서 세상을 비추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성화에서 예수님을 배신한 이스카리옷 유다가 촛불이 든 등을 들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배신으로 그리스도께서 로마군에게 체포되어 갇히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에서 촛불은 여전히 어둠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변함없이 어둡고 암울한 세상을 밝히고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 갇힌 촛불이 다른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발과 다리를 환하게 비춘다. 그리고 이 빛에 물든 베드로의 발은 아주 깨끗하고 단정해 보인다. 베드로의 신분은 하층민이었기에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투박하고 굳은살에 더러운 발이었어야 함에도 말이다. 이렇게 말끔하고 정갈한 베드로의 발에서 우리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할 수 있지 않은가? 곧 마지막으로 발만 씻으면 온몸이 깨끗해진다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이제 베드로의 모든 것이 정결하게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이미 용서하셨고, 그가 이런 정신적 회한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변화해서 온 쌍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부지런한 발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베드로는 신을 바르게 신고 있으며, 왼쪽 어깨에는 재를 치우는 긴 삽이 기대여 있다. 바로 이 삽이 회개 이후 베드로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삽은 세상의 촛불이신 주님께서 세상을 밝히고 지나신 자리에 남은 재들을 쓸어 청소해야 하는 베드로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따르는 베드로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삽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있는 것은 다른 사도들에 비해 베드로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림에 묘사된 베드로의 모습은 중세의 도상에서 보듯 황금으로 된 천국의 열쇠를 거머쥔 당당한 모습과 너무도 다르다. 이 그림에서 베드로는 나약한 인간, 갈등과 후회에 젖은 범인(凡人), 곧 한낱 배신자요 죄인에 지나지 않으며, 두 손을 꼭 쥔 채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회개자의 모습이다. 바로 이런 인간적인 모습의 베드로가 더욱 아름답고 고귀하게 보이는 것은, 내 마음에 이는 배신과 회개를 일삼는 오늘의 나,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약해 빠진 베드로의 빛나는 눈,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곤 소스라쳐 놀라며, 그 순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한 인간의 심성을 드러낸 두 눈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바로 이 눈을 내 마음의 눈으로 삼아 신앙의 길을 더욱 굳게 하는 것도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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