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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성 마태오의 소명 / 카라바조

by 파스칼바이런 2011. 11. 29.
성 마태오의 소명 /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 카라바조

1599-1600, 캔버스에 유화, 322x340cm, 이탈리아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콘타렐리 소성당 오른쪽 벽화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역대 미술가 가운데 예술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삶에서는 폭행과 결투, 살인과 도피, 투옥 등 어두운 그늘에서 살다 간 불운의 천재가 있으니, 서구 미술사에서 바로크 미술의 탄생을 알린 이탈리아의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년)이다. 광기 어린 천재이며 ‘저주받은 화가’로 불리는 카라바조가 전례 없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바로크의 개화를 알린 작품이 ‘성 마태오의 소명’이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상징물은 책이나 도끼창, 날개 달린 사람이며, 은행가와 회계원, 세금징수원 등의 수호성인이다. 이유는 그의 직업이 당대에 천시를 받던 세리, 도성을 드나드는 장사치들한테 인두세를 거두어 들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형편에 따라서는 상대를 협박하고 윽박질러야 하며 주먹을 날리거나 칼을 휘둘러야 하는 세리는 돈이라는 현실의 욕망을 달성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물의 전형이었다. 이런 세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의 제자가 되는 인생의 대반전을 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카라바조는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하시자 마태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기꺼이 제자의 길을 걸은 이런 극적 상황을 묘사하려고 갖은 조형 기법과 도상의 언어를 동원하였다. 그림을 보면 그 배경이 떠들썩한 장터라는 관례와는 달리 어둠침침한 도시의 불량배들의 소굴이다. 이는 세리라는 집단의 이기적 음모와 세속의 악행을 자행한 곳으로, 예수께서는 이런 음지의 죄인들에게까지 사랑과 회개의 손을 내민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그림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빛과 어둠의 대비가 극명하다는 것이다. 이런 대비를 빛의 명암법, 곧 테네브리즘이라고 하는데, 그림의 어둠 속에는 강인한 눈매와 오똑한 코, 가지런한 턱수염, 음푹 팬 볼 그리고 힘줄이 튀어나온 목 근육을 한 젊은 예수님이 강직한 자태로 손을 뻗쳐 누군가를 가리킨다. 이렇게 사실적이며 인간적으로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이 거리의 사나운 폭력배 같다. 하여 그림이 교회 내에서 논란거리가 되었음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 앞으로 등을 보인 채 예수님과 같은 손모양을 한 이가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원래 없던 인물인데 카라바조가 프로테스탄트의 성향을 읽은 교회에 화해의 몸짓을 보내고자 부차적으로 그려넣은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이 어둠속에 존재하며, 밝은 부분에는 커다란 창이 보인다. 이중으로 된 창은 속창은 열려있지만 겉창은 빛이 차단된 채 굳게 닫혀 있다. 그렇기에 그림에서 실제 빛은 예수님의 뒤에서 발현된다. 진실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간접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 겉창과 속창은 각기 구약과 신약을 상징하며, 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육화가 결국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기에 십자가 모양의 창문 격자가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손이 우리의 눈길을 이끄는 곳은 역시 어둠 속에 존재하는 한 무리의 세리들로, 이들의 시선이 예수님의 시선과 상충되고 있다. 특히 서 있는 자세의 예수님과 베드로가 수직구도라면, 앉아있는 다섯 사람은 수평구도이다. 이러한 안정적 조형성에 불협화음의 격정적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 그림자의 사선이다.

 

카라바조는 이런 상호 대비 구도를 통해 그림의 주제에 걸맞은 긴장감과 “따르라!”는 명령에 벌떡 일어나는 마태오 성인의 인생 반전이라는 극적 긴박감을 드러낸다. 이외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맨발에 튜닉과 망토라는 당시의 옷을 입고 있으며, 신발을 신고 칼(무기)을 찬 세리들은 착 달라붙는 바지와 줄무늬 셔츠에 깃털 달린 모자 등 17세기 당대에 유행하던 스페인 풍 의상을 하고 있다. 이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늘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소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런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한 대비 기법 이외에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손이 지목한 마태오가 과연 누구인지이다. 지금 세리 그룹의 다섯 사람 가운데 예수님 가까이 있는 세 사람은 빛과 주님을 발견하고는 몸과 눈길을 그 쪽을 향하고 있으나, 탁자 끝의 두 사람은 아직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한 인물은 동전을 세는 척하면서 이 어수선한 틈을 타 돈주머니를 슬쩍 감추고 있다. 다른 인물은 안경을 걸치고는 동전 세는 일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미술 관례상 안경은 지식인이나 철학자 등 박식한 인물이나 고매한 인품의 성직자를 상징한다. 물론 허망한 학식을 자랑하는 거짓 학자나 세속에 물든 신학자를 비꼬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세리가 늙수그레한 것과 안경을 쓴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 안경을 쓴 인물은 나중에 첨가되어 그려진 인물임에 틀림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모습을 한 이는 가운데 자리의 “저를 부르십니까?”라는 손 모양을 한 베레모의 사나이다. 그러나 카라바조가 이 그림에 이어 콘타랠리 소성당의 정면 제단화로 그린 ‘복음서를 쓰는 성 마태오’(1602년, 위 그림)에서 마태오는, 들창코에 대머리, 그리고 무식했기에 천사가 부르는 대로 한 자 한 자 받아 적느라 잔뜩 찌푸린 이마의 주름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다리 하나를 그림 정면으로 내밀고 있는 조신하지 못한 모습이다. 물론 이 그림은 완성 직후 곧바로 거절당하고 다시 그려야 했다(현재는 없어졌다). 그런데 이 상스런 마태오의 모습이 ‘성 마태오의 소명’의 왼쪽 끝에 있는 돈을 세는 세리와 아주 비슷한 것이, 이 인물이 진짜 마태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다시 그린 ‘복음서를 쓰는 성 마태오’(1602년, 아래 그림)의 마태오는 누구나 아는, 인자하고 박식한 성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인물의 모델을 ‘성 마태오의 소명’에서 찾는다면 안경 쓴 이다. 또한 당시 이 성당 안에 코바르트가 새긴 ‘성 마태오와 천사’라는 조각품이 있었는데, 이 작품의 마태오는 ‘성 마태오의 소명’의 베레모를 쓴 이를 닮았다.

 

특히 뢴트겐으로 이 그림을 투시해 보니 카라바조는 예수님의 손을 세 번이나 바꾸었다. 이는 그림의 마태오를 세 번이나 바꾸었다는 말이다. 그 세 인물은 위에 말한 각각의 인물에 해당한다. 이처럼 카라바조는 왜 자신의 입맛에 따라 마태오를 갈아치운 것일까?

 

아무리 거리의 부랑아 같은 카라바조라 했어도 한때 ‘몰타 기사단’의 기사였던 만큼 종교적인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카라바조가 이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은밀한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진정 부르시는 이는 바로 이 그림을 보는 ‘나 자신’이며, 그 ‘나 자신’이 바로 이 그림 속 다섯 세리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아닐까?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현대조각에 관한 논문으로 예술학석사를, 파리 3대학교(la Sorbonne Nouvelle)에서 아폴리네르의 예술비평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 활약하고 있다.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