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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순교

by 파스칼바이런 2012. 11. 24.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순교

(The Crucifixion of Saint Peter, 1600-1601)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소장.

지영현 신부(가톨릭미술가협회 지도신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하늘로 올라가는 영광을 입었으니 내 머리는 땅을 가리키고 다리는 하늘을 향해야 마땅합니다. 나는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으니 십자가를 돌려서 내 머리가 땅으로 오도록 매달아 주시오. 나는 그리스도를 닮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달릴 수는 없습니다.” 성 베드로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형리들에게 부탁한 말입니다.

 

카라바조의 ‘성 베드로의 순교’는 십자가형을 선고 받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발에 깊게 패인 이마 주름이 보이는 베드로는 일그러진 얼굴로 십자가 형틀에 못박혀있습니다. 중력 때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무거운 고통에 그는 머리를 듭니다. 그의 곁에는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형리들 외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형리 중 한 사람은 십자가를 세울 땅을 삽으로 파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베드로의 십자가가 세워질 그 땅에서 파낸 돌입니다. 매우 자세하게 묘사한 이 돌은 베드로가 바로 ‘반석’임을 나타냅니다. 또 다른 형리들은 베드로가 매달린 십자가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십자가의 고통은 곧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를 닮고자 했던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똑바로 달릴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바로 달릴 수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림을 통해 자신의 시대로 옮겨놓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이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지금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는 이는 누구인가”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10월호]

 

 


 

 

 

카라바조 [Caravaggio]

 

미켈란젤로 메리시(Michelangelo Merisi, 1571년 9월 29일 – 1610년 7월 18일)는 이탈리아 밀라노출신의 화가이다. 태어난 마을의 이름인 카라바조(Caravaggio)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삶은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600년 로마 미술계에 갑자기 등단했다. 그 이후 그는 어떠한 수입이나 후원자도 없었으나 그는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초기에 발표된 그에 관한 비평은 16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앞의 3년간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비평은 이렇게 말한다. "2주간의 작업 후 그는 데리고 다니는 하인과 함께 한 두 달간 칼을 들고 테니스장 여기저기를 으스대며 다녔고 싸움이나 논쟁에 개입되기도 하였다." [1] 그러다가 1606년 5월 29일 테니스 경기도중 말다툼 끝에 상대인 젊은 남자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도망쳐 나왔다. 이후에도 1608년 몰타에서 말다툼에, 1609년에 나폴리에서 또 다른 말다툼에 개입되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그를 고의로 살해한다. 다음 해인 1610년에 그의 10여 년간의 활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 에콜레(Porto Ecole)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극적인 조명과 사실적인 묘사로 바로크 양식의 탄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에 사실적이고 파격적인 주제들로 인해 비난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나 점차 인정받게 되어 유명해진다. 로마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미술의 흐름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사망 후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되어 거장으로 재평가되었다.

 

그가 주로 사용한 혁신적인 명암법 은 바로크 회화의 주요특징이 되었다(→ 색인 : 명암법). 그는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경멸하고 거리에서 소재를 취해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성 마태오를 주제로 한 3점의 그림(1597경~1602, 로마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뒤이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 The Supper at Emmaus〉(1596~98)과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Death of the Virgin〉(1605~06)과 같은 걸작들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