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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엘 그레코의 성가정

by 파스칼바이런 201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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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의 성가정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The Holy Family, 1587-1589)

지영현 신부 (가톨릭미술가협회 지도신부)

 

 

엘 그레코는 성가정을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이 작품에는 특이하게도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을 <성 안나와 함께 한 성가정>이라고도 부릅니다.

 

평화롭고 행복한 성가정의 한 때를 그린 이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성가정이 앞으로 겪을 구세사적 고난과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맑고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배경을 이루고, 구름 모양이 마치 마리아의 머리 위에 둘러진 후광처럼 보입니다. 아기 예수는 여느 아기처럼 천진하게 한 손으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젖을 빨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입을 굳게 다문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습니다. 첫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기쁨보다는 알 수 없는 근심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왼쪽에는 마리아의 어머니, 곧 아기에게 외할머니가 되는 안나가 아기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합니다. 안나의 얼굴은 수심이 가득하면서도 엄숙함이 묻어납니다. 이는 그가 아기의 운명이 어떠할 것인지 예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른쪽에는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는데 첫 아기의 탄생을 기쁘고 행복하게 바라보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왼손으로 아기의 작고 가녀린 왼발을 살며시 잡음으로써 앞으로 그 아기가 겪게 될 구원적 사건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엘 그레코의 <성가정>은 아기 예수 탄생이라는 기쁨, 행복, 축복과 함께 앞으로 이 가정이 겪게 될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직관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큰 축복이며 부부의 상호 봉헌적 사랑의 결실로 자녀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평생 운명 공동체로 살아갑니다. 가족구성원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난에 함께 동참해야 하는 동일 운명의 공동체로서 가정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축복의 장소이고 하느님 사랑이 드러나는 구원의 장소입니다.

 

[길잡이, 2012년 12월호]

 

엘 그레코(스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