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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성경의 세계] 다윗 이야기 (3)

by 파스칼바이런 2017. 1. 2.

[성경의 세계] 다윗 이야기 (3)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전 비파 연주자로 궁중에 들어갔다. 사울은 그를 무기병으로 삼았다(1사무 16,22).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타나자 저 젊은이가 누구 아들인지 묻는다(1사무 17,55). 앞장에선 무기병으로 삼았는데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서로 다른 전승이 나란히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골리앗 사건 이후 다윗은 사울 곁에 머문다. 군대를 통솔했고 싸우는 전투마다 승리했다고 성경은 전한다(1사무 18,7). 사울은 수천을 치고 다윗은 수만을 쳤다네. 당시 여인들이 불렀다는 노래다. 민심이 다윗에게 기울어 있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사울에게 밉보이고 피신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무작정 떠돌아다닌 건 아니었다. 세력을 키웠다. 곤경에 빠지고 빚진 자들 그리고 불만에 찬 이들을 모았는데 400명이 넘었다고 한다(1사무 22,2). 이들은 다윗을 추종했고 숫자는 늘어갔다. 이들이 있었기에 인색했던 부자 나발을 없애고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1사무 25장). 쫓기던 다윗은 마침내 필리스티아로 피신한다. 갓 임금 아키스에게 간 것이다(1사무 21,11). 갓(Gath)은 필리스티아 도시국가로 유다 땅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다윗은 부하 600명과 함께 아키스의 용병으로 1년 4개월을 살게 된다(1사무 27,7).

 

사울이 죽자 다윗은 필리스티아를 떠나 헤브론으로 이주한다. 600명 부하와 식솔들이 운집한 것이다(2사무 2,3). 헤브론은 유다의 땅 중앙산지에 있었고 성스런 곳이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로 여긴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레베카, 야곱과 레아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창세 49,31). 막강한 곳을 다윗은 선택했던 것이다. 600명과 식솔이라면 아이를 포함해 2,000명이 넘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헤브론 유지들이 찾아와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선언한다(2사무 2,4). 헤브론은 수도가 되었다. 훗날 다윗 아들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헤브론을 근거지로 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예루살렘 남쪽 30km 지점에 있으며 해발 930m 도시다.

 

유다의 유지들이 다윗을 왕으로 택한 것은 필리스티아인 때문이다. 그들은 기원전 12세기 가나안에 정착했고 이스라엘과 부딪쳤다. 당시 12지파는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독립된 공동체로 나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이 죽은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유다 공동체는 같은 지파 출신 다윗을 왕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선 사령관 아브네르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내세우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2사무 2,9).

 

[2016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