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은 여행의 어떤 쓸모 장수철 시인
여행에서 일찍 돌아온 우리는 트렁크에서 짐을 내린다 남은 나날을 음미하던 빈 집이 소란스럽게 구는 고요를 창 밖으로 급히 내던졌다
체크리스트의 역순으로 쌓아둔 며칠치의 멀쩡한 양말과 속옷과 알약들은 이제 캐리어 안에서 아무렇게나 뒹군다 때마다 우리는 일정량의 파국을 복용해야 하므로 급하게 돌아가야 할 이유들은 늘 넘친다
사실 여행이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발설해 온 헛된 희망의 순례 더럽혀진 양말과 속옷들 땀에 젖은 옷가지들 여행이든 일상이든 생의 침전물들은 순진한 몇 개의 기념품으로 위로되지 않는다
파국을 접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는 게 두려워 우리는 파국을 재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늘 이런 식이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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