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하 시인 / 나는 아직 처녀예요
나를 믿는 일이 중요했어요. 사람들이 나를 숭배하던 지난날 축제에서 나는 지상의 가장 높은 자, 붉은 의상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행렬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축제였지요. 난 준비된 살아있는 여신 내 몸은 그 흔한 점 하나 상처 하나 없는 흠 없는 몸, 피를 흘리기 전까지 신으로 살았어요. 피 묻은 짐승들의 사체 속에서도 울지 않고 견딘 내가, 나의 것을 견딜 수 없었어요.
나는 예정대로 쫓겨났어요. 가장 높은 곳에서 추락한 나는 사원이 보이는 이곳에서 늙어가요. 얼굴에는 주름이 하나씩 늘어 이젠 내 몸속의 피도 다 빠져 나가고 붉은 옷은 내가 흘릴 피의 미래였어요. 자신을 숭배하는 일은 고단 했지요.
나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늙은 처녀 쿠마리. 누추한 이 몸이 신이었다는 것을 나조차도 믿을 수 없을 때 지난날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해요. 이 기억마저 사라지는 날 완전한 인간이 될 거예요. 자, 이리와요. 나의 신성을 믿는다면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줄게요. 이게 나의 마지막 축복이 될지도 몰라요. 나마스떼.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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