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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정원 시인 / 햇빛 소리 외 1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10.

한정원 시인 / 햇빛 소리

 

 

        햇빛이 유리를 통과할 때

        거미줄 치는 소리가 들린다.

         

        피아노 건반이 여든 여덟 개밖에 없어서

        빛의 소리는 들려줄 수 없다는 말을

         

        그가 왼발 안쪽 발꿈치로 감아 찬 공이

        백 개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갈 때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보는 것 같다는

        그 말을

         

        나는 오늘 세 번 고쳐 썼다.

        일요일 정오 태양의 냄새에 대해서도

        기껏 쉼표를 넣었다가 다시 빼버리는 일,

         

        그늘 아래 차가운 언어를 흔드니

        마음의 물집이 눈을 크게 뜬다.

        모래 언덕에서 비탈진 그늘이 직각으로 기운다.

         

        너와 내가 같은 시간에 꽃!

        하고 외치면

        우주가 터질 것 같아

        햇빛이 비자나무 사이로 들어갈 때

        산유자나무는 톱니를 키우고

         

        ‘좌상 귀에서 흑이 준동할 수 있는 침착한 호착’이라고

        바둑 두는 남자는 말한다.

        햇빛 소리는 탁, 탁 아니면 똑, 똑

        바둑알이 비자나무에 얹히는 동안

        물방울 소리 가득

         

        나무였던 기억으로 시간이 인중에 걸려있다.

         

        너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는

        일인칭과 이인칭의 중간

        그 어디쯤에 햇빛이 지평선을 긋고 지나간다.

         

        살구나무 아래서 대낮을 쓸어 담는 그림자 소리가 길다.

 

계간 『시와 정신』 2017년 겨울호 발표

 


 

한정원 시인 / 스태프 온리

 

 

        숨어있는 꿈이라고 읽겠습니다.

        고요 속에 잠자고 있는

        책들, 슬리퍼들, 지갑들, 박스들, 통장들

         

        스위치만 숨을 쉽니다.

        긴장한 형광등 모서리가 어둠을 잘라냅니다.

        호두 파이는 하루 종일 서있고

        녹차 찌꺼기는 어둠 속 키스입니다.

        눈 밝은 사람은 키스할 수 없어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입과 눈만 크게 자라난 철제 벽장과 선반들

         

        그곳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관계자는 없습니다.

        폴 바셋트, 언더그라운드, 줄리언 오피, 시간을 잠재우는

        노끈 뭉치만 걸려있습니다.

        관계자들은 줄을 서서 매혹의 향기를 기다립니다.

         

        나와 관계없는 일에

        나는 관여하고 싶습니다.

         

        숨어있는 꿈은 여덟 시간 혼자입니다.

        다리 아픈 관계자는 갈 길이 먼 통로를 따라

        중얼거리며 숨어듭니다 오래 전

        출입 금지된 방에서 태어난 사람이 오늘은

        출입 금지된 방 밖에서 기웃거립니다.

        지나가다가 궁금해서 문을 두드려 봅니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들어가기 힘든 문에는 언제나 동파이프의 뿌리 같은

        붉고 단단한 글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Staff only

        손잡이가 굵은 문에서 누군가 암호를 대라고 합니다.

        나의 패스워드는 드림 027

         

        나무 그늘 아래서 다섯 번 고쳐 봅니다.

        스태프는 꿈을 까먹었습니다.

        숨어있는 꿈이라고 읽지 않겠습니다.

 

계간 『문예바다』 2018년 가을호 발표

 


 

한정원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수도여자사범대학교와 세종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졸업.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시와시학사, 2003)『낮잠 속의 롤러코스터』(시평사, 2005), 『마마 아프리카』(현대시학, 201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