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호 시인 / 회귀선
모래 위에 그려진 정교한 꺾은선 그래프 파도의 망설임은 침엽수 산 능선처럼 가파르다.
저토록 수위 조절이 힘든 사랑의 한 시절이 있었지만 어떤 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대는 갔다.
무릎을 꺾었다가 새로 일어서는 저 파도소리처럼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랑에게 꽃다발을 바친다.
시든 고백이 갈매기 발자국처럼 기억을 짓밟아도 그는 또 다른 배경 앞에서 웃는다.
자색 웃옷으로 환하던 얼굴이 옥색 재킷으로 더욱 말개져서 그에게 하늘과 바다는 경계가 모호하다.
파도가 기억을 살려서 그린 그래프는 모래밭 위에만 남아서 꺾이고 들리는 꺾은선도 모래로만 그려져서 그에게서 사랑은 사상누각이다. 그에게서 집은 새로 지어서 다음 파도에게 넘기는 것이다.
계간 『작가정신』 2017년 겨울호 발표
천수호 시인 / 묵
묵이 좋다. 이리 저리 찔러도 캄캄한 도토리묵 기포가 터지면서 얼굴을 때리는 그 뜨거운 묵 솥을 휘휘 휘저을 때 당신을 위해 집을 짓겠소. 속삭임까지 훅훅 뜨거운 묵이 좋다. 어차피 들어가 살지도 못할 집 그래도 피피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며 다짐한다. 어떤 그릇이라도 내밀어봐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지어줄게요. 내 집이 아닌 걸 모를 리 없는 묵은 어떤 선심처럼 억지처럼 검게 바닥부터 타들어간다. 휘휘 마음대로 저을 수 없는 앙금들이 눌어붙기 시작할 때 불을 끈다. 별빛을 다 담지 못하는 수천 개의 호수들처럼 단편의 기억을 굳히려는 종지 종지들 당신을 위해 이 집을 지었소. 말랑말랑한 검은 봉분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이미 떠날 것을 예감하면서 묵묵히
월간 『시인동네』 20167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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