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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명원 시인 / 낮과 밤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4.

한명원 시인 / 낮과 밤

 

 

- 부적

 

주머니 속은 항상 꾸벅꾸벅 졸았다. 점쟁이는 아이에게 태양을 그려 주머니에 넣어 주라고 했다. 손가락이 졸리거나 차가울 때 아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태양을 만졌다. 왼쪽 주머니에서 오른쪽 주머니로, 오른쪽 주머니에서 왼쪽 주머니로 태양은 옮겨 다니며 영원히 떠 있을 거라고 했다. 태양과 아이는 묵시록적인 말들로 대화를 했다. 애야 태양을 빼지마라 재앙이 닥친다. 태양을 만지는 순간 태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 몇 날 며칠 밤이 사라진 아이의 몸에서 열이 났다.

 

- 시험

 

문제들은 몇 십 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무겁다. 괄호에서 생기고 괄호에서 사라지는 정답과 오답들. 괄호는 동그랗고 텅 빈 태양을 반으로 잘라놓은 모습이다. 연필을 빙글빙글 돌릴 때마다 아이의 몸에 붙은 손가락 그림자들이 떨리고 춥다. 떨어져 있는 태양을 연필에 붙여 보려고 애를 써보지만 검은 글자들이 제멋대로 그려진다. 너무 길쭉한 동그라미들, 벌레처럼 오그라든다. 급기야 괄호를 손으로 잘라 떨어진 원을 붙여본다. 금간 태양 속으로 정답과 오답이 빠진다.

 

- 밤이 되지 못하는 날

 

주머니 속에 접혀진 태양의 뒷모습은 언제나 흐리다. 아이는 주머니 속에 태양을 꺼내서 펼친다. 접혔던 부분이 네 방향을 만들었다. 아이는 중얼거린다. 세상은 방향이 있다. 북극곰이 있고 남극 펭귄이 있고 이구아나가 있고 장화를 닮은 나라가 있고 에콰도르 코카 잎을 씹는 휴식이 있다. 아이에게 밤은 오지 않나. 몇 번의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잠을 잘 수도 있다.

 

- 주머니 안은 항상 낮

 

하늘에 태양이 둘인 세상이 있었다. 그곳은 항상 낮. 잠을 자는 한 아이를 위해 모두가 일하는 곳. TV는 금 수저로 시끄럽다. 아이는 옷을 벗어 물속으로 던진다. 주머니 밖으로 나온 태양이 물에 붉게 퍼진다. 아이가 붉디붉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낮과 밤을 번갈아 숨 쉰다.

 

계간 『불교문예』 2017년 봄호 발표

 


 

한명원 시인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석사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