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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혜미 시인 / 로스트 볼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5.

이혜미 시인 / 로스트 볼

 

 

나는 당신이 내버렸던 과실, 검게 타들어 가던 달 속의 씨앗, 단단한 씨앗에 갇혀 맴돌던 비명.

 

마음을 가질 새도 없이 이리저리로 몰려다니다 아득한 벼랑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을 꿈이라고 불렀지. 언제 무너질지 몰라 두근거리던 방향만을

 

가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아마도 먼 나라에서 훔쳐온 것, 말라가는 뿌리를 휘저어 당신에게서 멀어질 거야. 희고 외로운 열매를 맺겠지. 오래전 함께 스쳐 지나갔던 풀숲에서

 

나는 거꾸로 자라는 식물, 더러운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낯선 구석이 될 거야. 우주의 품속에서 조금씩 삭아가는 이 작고 얼룩진 행성처럼

 

다시 멀어지고 가벼워질 수 있을까. 몸을 버리고, 꿈처럼 공중에 매달린다면

 

계간 『시현실』 2018년 봄호 발표

 


 

이혜미 시인

1987년 경기도 안양에서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창비, 2011)과 『뜻밖의 바닐라』(문학과지성사, 2016)가 있음.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