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옥 시인 / 죽음으로 향하는 말도 있다
습관처럼 질주하던 말이 오늘도 이십 사 시간 불 밝히는 식당을 기웃거린다.
말끼리 한 잔 또 한 잔에 속내를 트림하는 말 위장의 쉰내는 우리들의 말을 서로 반복하게 한다
서로의 냄새에 무척 민감한 어미 다른 말들 뒷발에 걷어차인 소리로 언론사 윤전기 위에서 날뛴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활자들이 울부짖는다. 몸부림치다가 고삐를 풀고 뛰쳐나간다.
신호등 하나 껌벅이는 시간에도 말들은 수만 마리 새끼를 낳는다.
초원의 말들은 살기가 없다. 당근을 독점한 유비통신들이 꼭두새벽부터 갓 낳은 새끼들에게 모종의 살기를 불어넣는다. 강한 말은 펜 끝에서 나온다.
가장 더러운 말도 펜 끝에서 나온다. 새끼들 입에서 거미줄 같은 말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말이 말 타고 달리는 새벽. 죽음도 모르고 날뛰는 말들 사이 진정한 말은 펜 끝에서 죽는다.
계간 『창작 21』 2018년 여름호 발표
김은옥 시인 / 안개의 저쪽
안개가 잠 없는 말을 먹어버린다. 입이 먼저 사라지고 귀마저 닫힌다. 팔다리까지 뜯어 먹는다.
시간의 가로등에 철조망까지 쳐놓고 도시를 탐색하고 있다. 가끔 철조망 사이로 탐조등이 독수리눈으로 훑고 간다. 말 잃고 귀 잃은 눈빛들이 주의 깊게 서행하는 중이다.
안개는 점령군이다 권력의 추다 점령군에게 잡아먹히는 몸뚱어리들 지척을 분간하기도 힘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저 흐린 사물 뒤편에 숨어있는 눈빛들 불쑥 주먹을 내미는 나무들. 발톱을 세우고 물어뜯듯 달려들던 밤샘 노숙에 지친 익명의 그림자들이 안개의 권력을 신문지처럼 덮고 있다.
안개는 세계의 중심을 향해 전진하지만 그 중심을 흐리고 있다는 것을 안개 자신도 모를 것이다. 안개의 저쪽이 문득 그립다.
계간 『시산맥』 2015년 겨울호 발표
김은옥 시인 / 금방 지나가요
고추를 멍석에 뉘이고 다독이면서 어머니 생각
“하나님은…, 어찌먼 이리도…, 곡식 푹 익으라고 이렇게 좋은 날씨를 꼭 주셔야…, 그리 퍼붓다가도…, 안 그냐”
볼 일 없이도 핑계거리를 만들고 싶은 시월
태풍은 일본 쪽으로만 지나가리라는 예보 스마트폰에서는 가을 구름 콘테스트가 한창 벌어지는 중 나는 고양이처럼 화단 앞에서 어슬렁대고 있음
쓰레기 버리러 나왔던 앞집 아주머니는 계단을 오르다가 뒤돌아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이런 날씨 며칠 안 해요, 후딱 지나가요.”
고양이 한 마리, 혀로 물을 맛있게 날름거리더니 조심스레 발까지 적셔보고 어둠 속에서 걸음을 더듬어 보듯 다리가 둥둥 떠가듯 물웅덩이를 사뿐히 건너 사철나무 뭉치 속으로 사라진 뒤
우주 어디쯤 바람 새끼 몇 헤매고 있을 저녁 해거름이 몰고 오는 바람결에 막 풀 먹인 어머니 치맛자락 냄새
김은옥 시인 / 먼지는 힘이 세다
먼지는 뿌리가 깊다. 버림받아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입김에도 가볍게 날아가지만 돌아와 제자리에 내려앉는다.
눈짓만 해도 온몸을 들썩이다가 앉은 자리에서 천 년을 숨죽이기도 한다.
오래 묵은 일기장 사이에서 눈물 자국으로 얽어 있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돋보기 위에 내려앉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눈 껌벅이며 돌아앉기도 하는 것이다.
기쁘고 고운 날에는 낡은 성경책 갈피에 앉아 두 눈 붉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맑은 날 창가에 앉아서 보면 가닥가닥 집안 가득 뻗어 가는 먼지의 흰 뿌리들이 뼈처럼 드러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김은옥 시인 / 뿌리를 비추다
아직 바람이 찬데 밝은 문들 조용히 귀 기울인다.
온 마을 가득 두더지 떼가 몰려오나 흙의 내장들이 일어나 앉는다. 파릇파릇한 얼굴들 밥풀만한 대가리들 땅의 새끼들도 앞 다투어 고개를 내밀겠다.
수많은 말씀으로 손때 절은 골목길 뿌리들 웅성거리는 소리 가득하다. 어두워져만 가는 텅 빈 제비집 그 샛노란 주둥이들은 언제 집을 찾을까.
제비 기다리던 노인 하나둘 떠나가도 마라도 25마일까지 밝히는 등대보다 서해 5도와 황해의 42km까지 빛 쏘아주는 선미도 등대보다 더 거대한 등대가 땅속에는 있다.
황토벌판이 온통 들썩들썩 맥놀이 한다.
김은옥 시인 / 광인(狂人)
두 눈이 퀭하다. 검은 외투 겹겹이 두르고 더벅머리 이마에서 재가 날릴 듯
아무도 어느 곳도 아니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건널목을 건너는 중이다. 갈지자로 우왕좌왕 십자 모양의 건널목을 헤매고 있다.
두 눈이 끓고 있다. 언젠가 맑았던 그의 두 눈이 네거리를 통째로 빨아들이는 중이다.
2015년《시와 문화》 봄호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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