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리 시인 / 모래시계
뒤집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를 읽을 수 없어. 뒤집어지지 않으면 노을은 수평선을 그을 수 없어. 그리고 무덤은 이름들을 몰라.
폭우가 유리창을 딛고 지나가면 장면들은 뒤집어지지 편견은 다시 뒤집어지지
간절히 간곡히 전심으로, 이런 건 더욱 더 뒤집어지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밤이 많았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걸 열 번 더 해도 그냥 문을 열수는 없었지. 혁명은 문이 아니었지.
설명을 길게 하고 온 날은 몸이 아프다.
애인들은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사하지 않아야 한다.
뒤집어진 이후에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멀리 두기로 한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성급히 몸을 뒤집었고 또 누군가는 습관처럼 그걸 다시 뒤집고 이후는 늘 무심하니까. 모래가 입을 채우고 나면 조금은 다른 걸 생각할지 모르니까. 제 위치를 몰라 우리는 슬프게도 늘 뒤집어지는 중이니까.
월간 『시인동네』 2018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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