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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규리 시인 / 모래시계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7.

이규리 시인 / 모래시계

 

 

        뒤집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를 읽을 수 없어.

        뒤집어지지 않으면 노을은 수평선을 그을 수 없어.

        그리고 무덤은 이름들을 몰라.

         

        폭우가 유리창을 딛고 지나가면

        장면들은 뒤집어지지

        편견은 다시 뒤집어지지

         

        간절히 간곡히 전심으로, 이런 건 더욱 더 뒤집어지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밤이 많았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걸 열 번 더 해도

        그냥 문을 열수는 없었지.

        혁명은 문이 아니었지.

         

        설명을 길게 하고 온 날은 몸이 아프다.

         

        애인들은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사하지 않아야 한다.

         

        뒤집어진 이후에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멀리 두기로 한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성급히 몸을 뒤집었고

        또 누군가는 습관처럼 그걸 다시 뒤집고

        이후는 늘 무심하니까.

        모래가 입을 채우고 나면

        조금은 다른 걸 생각할지 모르니까.

        제 위치를 몰라

        우리는 슬프게도 늘 뒤집어지는 중이니까.

 

월간 『시인동네』 2018년 5월호 발표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세계사, 2004)과 『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등이 있음. 2015년 제6회 질마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