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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은희 시인 / 안대를 풀던 날 외 1

by 파스칼바이런 2019. 3. 15.

허은희 시인 / 안대를 풀던 날

 

 

간다 그곳엔, 내일도 간다 나는 단골손님 나를 주워 기른 주인이 있는 곳 오늘은 손님이 먹다 남긴 삼겹살에 밥을 볶아주겠다고 했다 나는 단골손님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당당히 먹으라고 바닥에 떨어진 수저도 쥐어주었다 언제나 처음 맛보는 요리로 나를 감동시켰다 익숙하고도 낯선 음식들이었다 침샘을 자극하는 비린내, 배부른 날도 배고픈 날도 없었다 거식과 폭식의 계절은 나를 살찌웠다 만족도 불만도 모르는 중독, 한입 거리 먹이를 물고 한입 거리 농담을 나누며 쥐어짜낸 걸음으로 나는 오늘도 그곳에 간다

 

새우깡을 제일 처음 먹은 갈매기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계간 『문학과 사람』 2018년 겨울호 발표

 

 


 


허은희 시인 / 스무 켤레의 신발을 갈아 신는 동안

 

 

사막, 흰 모래 검은 모래 그리고 등에 피는 휘파람.

바람, 곧은 음자리표 굴절된 음자리표 그리고 반사된 여음.

남겨진다는 것은 머물 처소가 만들어 졌다는 통보.

언제든 공들여 주저앉을 수 있다는 희망.

흐르는 것은 소리만의 몫이 아니야.

닳고 닳은 손바닥 발바닥의 실금은 어느 벼랑에 매달려 흔들리나.

거미, 줄로 이어진 길 줄로 이어진 낭떠러지 그리고 벌어지는 입 오므라드는 입.

구멍, 바닥이 없는 미끄럼틀 손잡이 없는 주전자 그리고 녹지 않는 마시멜로.

 

계간 『문학과 사람』 2018년 겨울호 발표


 


 

허은희 시인

1966년 인천에서 출생. 2003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으로 『열 한 번째의 밤』(한국문연, 2016)이 있음. 2016년 제28회 인천문학상과 2017년 제3회 시사사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