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초록나무 아래서 쓰는 머리말
하늘이 새파래. 그래도 총체적 난국인 시절, 경제와 동반 추락하는 사랑이니 그리움 이별이니 만남마저 푸른 부레를 가진다면 초록나무 이파리처럼 만어사 일만 마리 물고기처럼 떠올라 끝없이 파닥이다가 깨달음으로 붉게 물들어 갈 것 초록나무가 바람에 물결쳐서 초록바다 같은 계절이야. 나는 서두라는 말도 좋지만 머리말이라 하여 초록에 물든 머리말을 써야해. 출처도 모르는 괴 소문이 상어처럼 출몰했다가 사라지는 때 나는 초록나무 아래서 초록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 희망의 글을 써야해. 한 사나흘 걸어 내 초록 머리말로 들어오면 영원히 갈증을 씻어줄 천년 우물이 있고 푸른 대나무 마디마디로 자라는 푸른 정신도 있는 이제 초록이 대세였으면 좋겠어.
그린벨트도 흐지부지. 옥상에도 빌딩에도 수직으로 수평으로 초록이 자라는, 뼈마저 초록으로 물들어 초록의 도시를 이루어 가는 초록 사람으로 초록 사슴으로 초록 애완견으로 초록의 이장님 초록의 대통령으로 초록의 오체투지로 초록의 설산을 찾아가는 순례자가 끊이지 않는 초록나무 아래서 머리말을 쓰면 엘도라도 신천지 개벽 혁명 대초원 구름 백두대간 우사 운사 성황당 마니산 신도시 등 초록나무 보다 더 먼 것이 생각나지만 초록문장 초록 사랑 초록 물고기 초록 새 초록 글 초록 우산의 자유 초록의 입맞춤 초록의 오르가슴 초록 소쩍새 초록의 한반도 에 대한 생각도 심해서 방울방울 떠오르는 기포 같이 떠올라 초록나무 아래로 불어온 바람도 초록의 바람이 되어 또 어딘가로 불어가. 초록의 비가 내리고 초록의 구름이 흐르고 초록의 풀마저 바람에 나부끼고 진짜, 진짜 초록의 나라가 온다면 내 초록나무 아래서 쓰는 머리말은 잘못된 낙서처럼 지워져도 좋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초록문장으로 쓰며든 내 아픈 노래, 임을 향한 행진곡도 만산홍엽같이 져도 좋아 하늘이 새파랗고 난 운 좋게도 초록나무 아래서 머리말을 쓰는 호사를 누려. 머리말도 말 같아 머리말을 타고 북벌에 나서기 좋은 계절. 난 초록나무 아래서 머리말을 쓰고 멀리서 원정군처럼 바람이 불어와. 내 마음도 초록나무와 함께 바람에 끝없이 물결쳐, 초록 바람이 불라치면 직립의 내 중심이 슬픈 예감처럼 끝없이 흔들려 아직은 초록의 나라가 멀고멀기만 하기에 계간 『시작』 2018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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