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숙 시인 / 어느 날의 환승역
이정표가 없었다.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데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다. 머리 위에도 발밑에도 길 벽면에서 화살표가 날아다녔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까만 뒤통수들이 층계를 올라갔다. 모자 쓴 뒤통수, 상고머리 뒤통수, 더벅머리 뒤통수.
매점 지나고 사각 기둥 지나 환승통로에 들어섰다. 창이 없는 통로엔 해가 뜨지 않았다. 길 끝에서 길 끝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몰려갔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우울한 계절이 몇 번인가 얼굴을 바꾸었다.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겨울겨울 외투를 벗었다가 다시 껴입었다.
해가 뜨지 않았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눈발이 날렸다. 꿈을 꾸어야 춥지 않았다. 깨어나면 추워 추워, 하며 사람들이 죽어 갔다. 뒤통수에 희끗희끗 서리가 앉아 있었다. 매캐한 죽음의 냄새가 공중에 떠다녔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운동회 날 울리던 휘파람행진곡이었다. 죽은 자가 죽은 채로 일어나 걸었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발밑에서 와사삭 서릿발 소리가 났다. 쥐들이 통로를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어깨를 부딪치며 아슬아슬 지나갔다.
저마다 제 꿈속을 걸어갔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이 길은 언제 끝날까 끝이란 게 있기나 할까. 행진곡이었던 휘파람은 장송곡이 되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곡조. 이게 꿈속인지 잠 속인지 환기 되지 않은 불빛이 몽롱하게 비췄다. 어디로 가고 있지? 어디로 가고 있어? 통로 끝 출구는 보이지 않는데 빗발치는 화살표, 화살표.
웹진 『시인광장』 2019년 1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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