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석 시인 / 벽 너머 도서관은 확고한 봄이며 개인의 것이다
도서관이 없어졌다. 다 써서 남은 도서관이 없었다. 도서관 가는 길도 어둠에 둘러 싸였다. 내게 도서관은 사과밭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줄곧 그곳에서 자랐다. 그러다 나의 인생을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도서관 보다 빈곤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도서관이 사라지다니
누군가 눈이 온다고 창밖을 내다보라고 소리쳤다. 눈이 버스 정류소를 흰빛으로 덮고 있었다.
강물이 흘러 바다에 들어가면 섞여버리듯 도서관이 되어버린 나는 그냥 바다였다. 서가에 분류된 책들을 어디서 꺼내 볼 것인가.
난로 위, 물이 끓었다. 김이 올라서 사라졌다. 어디서 물을 찾을까.
외설적인 소설 한권도 뽑아 들 수 없었다. 내용이 유실된 『』 표제만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다. 바람 불고 파도가 높은 날은 『』 표제마저 어렴풋하여 바다의 깊이와 넓이를 한탄했다. 고래를 키우든 상어를 키우든 나는 캄캄하고 막막한, 활자하나 떠오르지 않는 바다였다. 책을 삼킨 고래처럼 심연에 무엇을 숨겼는지 출렁이는 파도만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낚시를 하듯 도서관에 가서 바다에서 유영하는 책들을 건져 올려야 한다. 도서관에 가야만 있는 물고기들
도서관이 클까요? 사람이 클까요? 바다는 입술이 없어요.
도서관에서 건져 올린 한 마리 물고기, 혹은 무수한 물고기, 한 페이지에서 다음페이지로 가지런한 바다, 물길을 따라 고래 배 속을 지나 난파된 배의 조각을 붙잡고 망망한 바다 기슭에 머리를 내밀고 숨을 내 쉬곤 했다.
바다 속을 유영한 후 밀려드는 어둠에 기대어 앉았다. 펼쳐볼 수 없는 도서관, 몸을 작게 웅크려 앉아서 한 계절, 두 계절, 세 계절,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도서관에서 파도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도서관에서 바다 비린내를 맡은 기억이 났다. 감각과 후각이 일어나 건너편에 마주보고 기대어 앉았다. 봄 아지랑이가 피는 것을 환영으로 보았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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