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욱 시인 / 입추(立秋)에 만나는 니이체
맹인의 감은 눈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높고 깊은 가을의 투명성. 투명은 모든 것을 이기고 꺾이는 것은 날씨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아폴론을 내쫓고 죽어 있던 디오니소스를 되살린다. 붉은 광풍의 여름을 건너가는 일은 조용하게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다.
죽음 가까이에서 천착(穿鑿)된 사색 영면의 시작은 오히려 화려하다.
무한한 입속으로 검은 구름덩이들을 막막한 바다위에 뱉어 놓은 물거품같이 녹여버리고 창조와 사랑의 신을 부른다.
건너 가야할 다리가 서서히 드러나고서야 명료해지는 머리. 이성의 서리 돋친 삶은 삶이 아니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로 눈 뜬 삶을 살게하는 가을.
분노조절능력을 상실했던 여름의 차가운 몸뚱이에서 딱딱한 의지를 떼어내고 그 위의 반질거리는 자국들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서정의 깊이로 몰아간다.
겨울이 오기에 여름에만 머물 수 없는 것은 겨울은 마법같은 긴 눈썹을 휘날리며 아폴론도 디오니소스도 잠재워버리기 때문이다.
가을이 움켜쥔 불씨에 스스로의 살점을 조각내어 남김없이 태우고 태워 포용의 겨울을 준비한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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