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우 시인 / 9와 4분의 3 승강장
선풍기를 틀어 놓고 외출했다. 돌아온 저녁, 그림 속 여자가 머리끝을 흩날리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지하철에 뛰어든 사람을 담담하게 보도했다. 목격만 있는 그 사람도 승강장을 찾고 있었는지 추락은 한 발자국 들어가 있었다. 들어간 만큼 뒤로 밀려나오는 핏자국이 다음 역으로 가는 제의처럼 집 안을 가득 채워 갈 때
열려 있는 새를 운명으로 보는 날이 있을 것이다.
벽 속에 들어간 것을 아무도 본 일이 없지만 흔적은 선(先)에 없고 반질반질한 혹은 조금 들어간 후(後)에 있다.
그는 다니던 학교에서 마법을 배우려고 했을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세계에서 벽을 밀고 또 밀면 자라나는 방들, 빗자루를 타고 꽁지에서 추진력을 얻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왜 기차 첫머리를 향해 뛰어드는지 한 번도 선두를 유지해 본 일이 없는, 어쩌면 너무 멀리 간 선두를 만난 건 아닌지 앞서간 사람 뒤를 보고 있다가
열차가 지나가자 나는 움찔 뒤로 물러선다. 분명 몇 사람이 열고 들어간, 그림 밖으로 머리카락이 날리는 역을 지난다. 이동과 소멸은 후미에 있다는 듯 선로 맨 끝에 누워 있는 세상을 향해 바람이 분다.
시집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민음사, 2018)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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