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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대호 시인 / 나를 만지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4. 5.

김대호 시인 / 나를 만지다

 

 

이제 일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은 없다.

퇴화하고 겨우 흔적만 남은 꼬리뼈 같이 이제 내 일생을 만지면 내 뒷면에 흔적으로만 있는 꼬리만하다.

이 따위로 뭘 하겠는가.

밥이나 잘 먹고 계단을 조심하면서 갔던 곳을 또 가서

혹시 흘리고 왔을지도 모를 내 체온을 다시 몸에 담아오는 일이 남았다.

 

나를 사육하고 또한 방목시키는 사랑이여.

너를 믿고 여기까지 왔고 혁명을 꿈꿀 때나 붉은 구호를 외칠 때도

사랑이 내 곁에 없었다면 내 혁명과 구호는 불량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도 사랑이여.

내가 너를 못알아보는 순간에도 사랑이여.

 

난 모르는 것들과 놀고 싶은데 왜 아는 것들만 기어 나올까.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모르는 것은 순간적으로 아는 것이 된다 사실이 되고 사물이 된다.

말하는 순간 미덕은 순간 불결한 것이 되고 과거는 순간 미래가 된다.

언어의 폭력으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입만 열었을 뿐인데 공장 건물이 무너졌다.

난 이 난폭한 언어를 신앙으로 가진 자이다.

어떤 거대한 폭력으로 내 인생의 전환기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변할 때마다 나를 전환기로 이끌고 간 것은

사소한 말 한 마디였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알았을 때

사랑이 고통이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은 말 한 마디로 시작 되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고

내가 모르는 장소에 있었다면

사랑은 아직도 시작 되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시작 되지 않았을 일이다.

아직 시작 되지 않은 어린 내가 언어를 입에 물고 빨고 있다.

아 그리운 옹알이여.

 

웹진 『시인광장』 2016년 1월호 발표

 

 


 

김대호 시인

2010년 수주문학상 수상. 2012년 《시산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