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 /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대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월간 『현대문학』 1958년 11월호 (미당 서정주 추천) 발표
작품해설
변모의 시인’으로, ‘거듭남의 미학’으로 평가받아온 시인 황동규.
그의 초기시를 보면 어려운 현실에 동요하지 않는 자아의 근원적인 몸짓을 탐구하는데 이러한 자아에 대한 끈질긴 추구는 비가(悲歌) 등의 작품에서 일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황동규 시의 핵심에는 자아와 현실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현실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후기에 이르러 한층 유연해진 황동규의 어법은 풍장 연작시에서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죽음의 허무를 초극한다.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미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담고 있다.
초기의 고뇌에서 자기 삶의 내부로 비극의 비전을 비쳤던 그는 차츰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수행하면서 민족의 약소함과 황량한 우리 삶의 풍경을 묘사했고 이 참담한 상황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드는 힘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무력감을 표명했다. 아마 이러한 정신의 전개는 사랑의 변증볍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웃으로 번지고 드디어는 三南―이 가냘픈 한국과 그곳에 괴로이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로 확산되었다. 이 사랑을 확실히 하고 더 큰 사랑으로 만들기까지 그는 많은 고뇌와 절망, 안타까움과 자조를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극복했다.
그는 가장 확실한 시인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변증을 시를 통해서 수행했고 언어로 그것을 증명했다. 그의 섬세한 감각, 날카로운 감수성은 고도로 세련된 지성으로 정련된다. 그의 시가 격앙될지언정 흥분하지 않고 분노할지언정 아우성치지 않으며 市井의 밑바닥을 그릴 때에도 그의 말은 남루해지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모든 시인은 막스 삐까르의 말대로 ‘어떤 결핍’을 찾아나서는 영원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소극적인가 적극적인가, 아니면 내외향적인 것인가는 순전히 시인 자신에게 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방식의 차이에 자연히 귀착하게 된다. 시인 황동규는 자신만이 느끼는 어떤 결핍을, 처음에는 연시로부터 출발하여 일부 정치적 참여시, 허무적 선시풍에서 다시 ‘극서정시’, 나아가 쉬임없는 여정에 ‘적극적’(삐까르의 ‘침묵의 개념’)으로 몰두해 있는 것이다.
그의 초기 시에서는 어지럽고 가혹한 현실에서도 함부로 동요하지 않는 자아의 근원적인 몸짓을 탐구한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끈질긴 추구는 「비가(悲歌)」 등의 작품에서 일관되어 나타나고 있고 특히 자아의 근원적인 것의 추구에서 얻은 고통, 부재, 그리움 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러한 노력은 폐쇄된 자아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현실의 부조리, 어둠 등과의 관계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그러다 「허균」, 「열하일기」 등의 연작시에 와서는 사회와 현실의 긴장 관계로 발전되고 있다. 황동규 시의 핵심에는 자아와 현실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즉, 그는 현실과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태평가」를 비롯한 「삼남에 내리는 눈」은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며 시적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인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 후기에 이르러 한층 유연해진 황동규의 어법은 「풍장」연작시에서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죽음의 허무를 초극한다. 죽음에 대한 명상으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미의 자유분방한 표현을 담고 있다.
이 시는 황동규의 1980년대 시세계를 대표하는 연작시 <풍장>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완벽한 자유에로의 귀환의지와 투신에의 갈망이 상징적인 표현 가운데 선명하게 요약되어 있어 주목을 환기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그저 담담함이다. 죽음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바람'과 '죽음'의 이미지를 결합하여 일상의 고달픔과 질곡을 벗어나 정신의 가벼움과 투명함을 성취하는 동시에 영원한 이상 세계인 '무인도'에 도달하여 무한한 자연에로 귀환하려는 의지가 아름답게 그려진 작품이다.
시적 자아는 풍장을 시적 상황으로 설정하여 자신이 죽을 경우 풍장시켜 줄 것을 부탁하고, 아울러 시간의 경과에 따른 풍장의 과정을 담담하고 비장한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시적 자아가 이러한 풍장을 염원하는 것에서 현실에 대한 시인의 허무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바람이 지니고 있는 소멸의 이미지를 통해서 제시된다. 여기에서 바람은 살과 피를 말리우듯 일체의 사물을 소멸시켜 자연의 일부로 되돌리는 생명 순환의 원리를 상징한다. 결국, 이러한 죽음마저 그 어떤 세속적 가식이나 신성한 의미도 거부한 채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함께 논다는 것에서 허무에 바탕을 둔 시인의 현실 인식과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지향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의 죽음은 단지 자연과 우주의 무한한 순환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슬퍼할 것도 미화시킬 필요도 없고, 거기에다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덧붙여서 신비화하거나 신성화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상식을 뛰어 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죽음관과 죽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태도와 어조는 우리 시의 전통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는 삶에 대한 세속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삶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시인의 진지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황동규 시인 / 풍장(風葬) 1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白金)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시집 『풍장(風葬)』(문학과지성사, 1995) 중에서
황동규 시인 / 十月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夕陽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旅程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木琴소리 木琴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四面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丹靑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뒤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燈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燈불들은 다만 그 숱한 鄕愁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월간 『현대문학』 1958년 2월호 (미당 서정주 추천) 발표
황동규 시인 / 동백나무
그 女子는 또 손을 반쯤 들고 서 있구나 햇빛이 잔잔한 속에 밀려있는 하나의 波濤와 같이
햇빛은 얼마나 잔잔한 것일까 얼마나 고요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우리를 느끼게 하는 것일까 그 女子의 마음 속을 적시는 맑은 물결의 흐름을
햇빛처럼 내리는 지난 날의 서러움에 가느단 폭포처럼 쏟아지는 알 수 없는 속삭임에 바람은 머얼리서 또 가까이서 기웃거리며 지워주고 있는가
그 女子의 마음 속에 나타나는 모든 생각들을 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허나 우리는 안다, 그 女子가 손을 반쯤 들고 서 있는 것을 그리고 맵시있게 모든 하고픈 말을 않고 있는 것을.
월간 『현대문학』 1958년 11월호 (미당 서정주 추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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