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상> 예루살렘 성전 정화하시고 당신 죽음과 부활 예고 가톨릭평화신문 2021.03.28 발행 [1606호]
마르코(11,1-11)ㆍ마태오(21,1-11)ㆍ루카(19,28-38)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단 한 번 예루살렘에 가신 것으로 묘사한다. 바로 수난 때이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여러 번 예루살렘에 들른 것을 암시(마태 23,37; 루카13,34)하지만 수난 직전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는 절대로 예수님께서 그곳에 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예루살렘을 다섯 차례나 방문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9~10월에 지내는 ‘초막절’(7,1-36)과 초막절 석 달 후 겨울에 지내는 ‘성전 봉헌절’(10,22-42)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 봄 축제’(과월절, 무교절) 때 예루살렘에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세 차례 예루살렘 파스카 축제에 참여하셨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파스카 축제 때 ‘성전을 정화’(2,13-25)하셨고, 두 번째 파스카에서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셨다.’(5,1ㅡ6,4)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파스카 축제였다.(12,12-19. 19,1ㅡ20,23)
성주간과 주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며 네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해 2회에 걸쳐 살펴본다.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제자들의 무리와 수많은 군중이 자기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았다.
제자들이 어린 나귀 등에 겉옷을 걸치고 거기에 예수님을 올라타게 한 것은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왕좌에 올림을 받는 장면을 연상시킨다.(1열왕 1,33-34)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다윗 왕조의 전통에 따른 ‘즉위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다윗 왕조의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의 징표인 종려나무 가지(1마카 13,51 참조)를 흔들며 예수님께 “호산나!”(도와주세요)를 외쳤다. 이 도움의 청원 ‘호산나’는 다윗 왕조의 통치와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 통치가 새로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희망의 환호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즈카르야의 예언처럼 나귀를 타고 오는 평화의 임금이실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죽임을 당하는 목자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성전 정화
마르코 복음서는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고 한다.(마르 11,15-19) 그리고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요한 2,14-15)
격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신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이사 56,7)하며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빌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예레 7,11 참조)고 성전 장사꾼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 입구 광장인 ‘이방인의 뜰’에서 일어났다.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유다인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말씀하셨다.
성전의 오용을 막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 맞갖은 행동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로 성전 정화의 정당성을 증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종말을 고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당신 자신이 인류의 새 성전이 되셨다.
성전 상인들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눈먼 이들과 절름거리는 이들을 고쳐주셨다.(마태 21,14) 짐승을 사고파는 것과 금전 거래에 맞서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선행으로 대응하셨다. 참된 ‘성전 정화’이다.
종말을 예고하시다
성전 정화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면서 성전 파괴를 예고하셨다.(마태 23,37ㅡ24,3; 루카 13,34-35; 21,5-6)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다.(마태 24,29-31; 마르 13,24-27; 루카 21,25-28)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예루살렘의 최후와 세상 종말 사이에 ‘이방인의 시대’가 들어설 것이라고 하셨다. “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될 터인데, 그때에야 끝이 올 것이다.”(마태 24,14)
예수님께서는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마태 25,1-13), 깨어 있는 문지기에 대한 말씀(마르 13,33-36), 무화과나무의 교훈(루카 21,29-33), 참포도나무의 비유(요한 15,1-17)를 통해 언제 닥칠지 모를 종말에 대비하여 깨어 있을 것을 당부하셨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깨어 있음’은 자신이 지금 하느님의 눈길 아래 있음을 알고 그분의 눈길 아래서 살듯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나자렛 예수」 2권 70쪽)
최후 만찬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마르 14,12; 마태 26,17; 루카 22,7)에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하셨다고 한다. 이에 반해 요한 복음서는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요한 13,1) 최후 만찬을 하셨다고 한다. 때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가진 최후 만찬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아버지 하느님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헌의 날로 삼으셨다.
요한 복음서는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고 묘사한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 예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할 때의 차림이다. 그리고 발을 씻겨주는 일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제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며 봉사하라는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15)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라는 주님의 새 계명으로 확장된다. 예수님의 행위가 곧 우리의 행위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다. 짐승의 피는 속죄할 수도,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할 수도 없다. 오직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로서 새 계약을 맺을 수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단순하게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하시고, 잔을 들어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하신다.(마르 14,22-25; 마태 26,26-30) 그러나 루카 복음서는 이 말씀에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이라는 말씀이 첨부돼 있다.(루카 22,19-20) 예수님의 새 계약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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