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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말씀묵상] 생명의 길은 '소유'가 아닌 '비움'입니다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0.

[말씀묵상] 생명의 길은 ‘소유’가 아닌 ‘비움’입니다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지혜 7,7-11) 제2독서(히브 4,12-13) 복음(마르 10.17-30)

가톨릭신문 2021-10-10 [제3264호, 15면]

 

 

하느님 앞에서는 재물도 한 줌 모래 기득권 버리고 이웃과 함께 나눠야

신앙인으로서 형제애 실천하고 생명이신 주님 섭리 충실히 따르길

 

 

연중 제28주일인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난’에 주목해봅니다. 가난이라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필리 2,7)의 겸손과 그리스도를 닮아 ‘가난 부인’(Lady Poverty)을 품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비움을 되새깁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복음 환호송)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은혜를 청합니다. 솔로몬처럼 기도로 청하면 성령의 선물인 지혜를 얻습니다. 주님의 진리인 ‘지혜의 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富)가 들려 있습니다.(제1독서)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혜 앞에서는 온 세상의 금도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진흙처럼 여겨집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잠언 9,10) 하느님께서 세상을 지혜의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질서 있게 다스리십니다. 지혜에서 아름다움이 계속 나오기에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합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1열왕 5,9)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과 봉헌이란 장엄한 업적을 이뤄 백성의 마음을 한 분이신 하느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자애를 간청(화답송)하며 유한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겪는 비참한 고통에 인내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베푸시는 자비와 은총에 감사드리며 생명의 길로 기쁘게 나아갑니다.

 

성경에는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인 생명의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쌍날칼보다 날카로워 사람 속을 꿰찔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제2독서) 하느님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드려야 합니다.”(히브 4,13)

 

교회는 언제나 성경의 말씀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생명의 양식’인 말씀은 성찬례를 통해 모시는 ‘생명의 빵’(요한 6,35.41.48.51)입니다. 하느님께 어떻게 셈을 해드려야 할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영원하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선행과 나눔의 ‘형제애’를 계속 실천할 것을 간곡히 권고합니다.(히브 13장)

 

유다 사회에서 율법 교사들에게는 ‘랍비’(Rabbi 스승) 존칭이 주어집니다. 부자의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 교사로 보이나 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예수님께서는 선하시다는 표현을 가늠하고 부인하시면서 존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이르십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고통과 죽음도 포함)은 성부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있고, 그분의 완전한 신성이 본래 자리임을 알리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해답은 누구나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둘째 돌판에 나오는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탈출 20,13-16; 신명 5,17-20)을 열거하십니다. 신앙인의 윤리의 토대이고 영적 성장의 출발점인 계명을 어려서부터 충실히 지켜온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되길 바라나 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고 제자로 삼는데 부족한 하나를 이르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소유 아닌 비움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부자는 소유의 길을 선택하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자기를 버리고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듯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참으로 어렵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재물의 소유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신비는 ‘자기 비움’입니다. 비움은 재물의 소유를 포함한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형제애의 실천입니다.

 

‘시간은 돈’이라며 일에 대가를 바란다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고받는’ 세상의 법칙을 따르면 하늘나라의 보물창고에 쌓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충실한 제자는 현세에서 박해를 받을지라도 주님의 충만한 축복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질서(창세 1,28-29)와 인간다운 삶에 재화의 보편적인 목적이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은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에 으뜸가는 원리요 교회의 전통입니다.(사회교리 174. 182)

 

박봉에 소유한 것이 없어 어린 자녀들에게 성경 외에는 물려줄 것이 없다고 일러준 샐러리맨은 신자의 의무를 지킵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의 전 생활비를 헌금함에 넣는 모습을 보신 주님은 누구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고 하십니다.(마르 12,41; 루카 21,1 이하) 모든 것을 포기한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을 하면서도 청빈의 삶을 삽니다.

 

자비하신 주님, 진리의 말씀과 성찬으로 저희를 길러주시는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재물과 돈에 저희가 집착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소서.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가난한 마음으로 참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