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여인들] 룻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배고픈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 배부른 이들에겐 하나의 추억이지만 여전히 배고픈 이들에겐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묻는다. 우리의 어머니들에게 이 이야기는 추억일까, 트라우마일까.
언뜻 보기에 나오미와 룻의 관계는 애틋하고 포근하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 어머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저도 죽어 거기에 묻히렵니다. 주님께 맹세하건대 오직 죽음만이 저와 어머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룻 1,17). 그러나 룻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후, 가난한 생활은 그의 일상이었고, 과부의 삶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조차도 사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집안의 재력가 보아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보아즈는 룻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룻 2,11).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건네진 하느님의 말씀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룻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약속과 그로 인한 축복을 갈망했던 이스라엘 성조들의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 룻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 안에서도 제 민족과 고장을 떠나 주님의 구원 여정에 함께하는 여인들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룻의 이야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보아즈가 과부가 된 룻을 맞아들이는 데 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즈와 함께 잠자리에 들 것을 요구한다. 룻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시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였고 그 뜻은 사별한 남편 대신 집안의 한 남자를 통해 후손을 잇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오랜 관습이고 그 관습대로 후손을 잇게 할 책임은 집안 남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후손을 이을 그 남자를 ‘구원자(고엘)’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런데, 보아즈는 밤에 몰래 자신의 발치에 들어선 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아즈는 남몰래 룻을 구원한 게 아니었다. 밤의 만남은 대낮의 성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보아즈는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성문 앞에서 ‘공식적으로’ 백성과 원로들의 축복을 받으며 룻을 맞아들이게 된다.
후손을 잇는 데 있어 이스라엘의 남정네들의 책임과 의무는 야훼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의 축복에 대한 절대적 신앙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이 남자들의 구원 의무와 그 실행, 그리고 후손을 득한다는 결과론적 해석에 방점이 찍혀 읽혀진다면 우리는 성조들의 이야기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여인들의 지혜와 용기를 폄훼하고 만다. 역사의 뒷 그늘 속에서 다소 차별적인 그 사회의 관습을 따라가는 성서 속 여인들의 움직임은 하느님의 축복에 민감하게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 남성들의 책임을 다시금 일깨우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여전히 여인이 짊어질 책임이 있다며 아이 못 낳는 여인에 대한 혐오가 버젓이 작동하는 한, 룻의 이야기는 세상 속 남자들이 어떻게 한 여인을 받아들이고, 그 여인에 대한 어떤 존중을 긴장감 있게 가질 수 있는지 성찰케 한다. 진부한 듯 하나, 아이는 혼자 낳는 게 아니고, 아이는 제 삶의 자리를 떠나와 한 몸을 이루는 부부의 초월적 사랑의 결과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 볼 일이다.
보아즈와 룻의 아이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다.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태어날 다윗 가문은 이렇게 낯선 이방인 여인 룻과 그를 따뜻이 맞이한 이스라엘 남자 보아즈를 통해 전해진다. 메시아 … 하느님과 백성을 만나게 하는 이. 부부가 되었건 고부가 되었건, 서로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작은 일에서 메시아의 가치를 되새김질해도 좋으리라.
[2021년 10월 10일 연중 제28주일 대구주보 3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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