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새로운 계약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광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탈출 33,19)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간청에 따라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지만, 당신이 지니신 모든 좋은 것을 모세에게 그대로 보여주시지 않고 그의 앞을 지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걸까요? 다음 말씀에서 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되,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그 영광을 보고 나서 살 수가 없기에) 지나가며 보여주신다고 말씀하신 것 아닐까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 누리게 될 구원의 상태’를 표현하는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 Vision of God]이라는 단어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즉 [살아있는 이들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 누리게 될 완전한 구원의 상태는 [‘지복직관’이라는 개념이 뜻하는 것처럼] 바로 ‘하느님을 직접 마주 보는 복된 상태에 다다름’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완전한 구원은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고, 그러한 상태는 죽음 이후에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을 보려면 죽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살아있는 우리에게 구원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자비롭고 너그럽고 진실하신 하느님
당신의 영광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고 하신 하느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탈출 33,19) 하느님께서 모세가 당신의 얼굴을 보고 죽지 않도록, 모세에게 자비와 동정을 베푸신다는 말씀일까요? 아직 할 일이 많은 모세라 죽을 때가 아니니, 하느님께서 자비와 동정을 베풀어 당신을 보고 죽지 않게 하셨다는 말도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이 말씀이 하느님 자신에 대해 잘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는 말씀에 하느님 자신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깨뜨려버린 그 처음 돌판에 새겨져 있던 말을 내가 새 돌판에 다시 써 주겠다.”(탈출 34,1) 하시며 선포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실 때 모세 앞을 지나가며 하셨다는 말씀이 그것인데, 이 말씀은 앞서 탈출 20장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미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탈출 34,6-7)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오해가 없도록 분명한 말씀으로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자비롭고 너그럽다. 쉽게 분노하지 않고 참으로 자애롭고 진실하다. 나는 대대손손 너희에게 자애를 베풀어 너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겠다. 하지만 너희는 너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벌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네가 깨뜨려버린 그 처음 돌판에 새겨져 있던 말을 내가 새 돌판에 다시 써 주겠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의 돌판에 당신의 사랑과 뜻을 새겨 주셨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내 마음의 돌판은 지금 어떠한가요? 새겨진 말씀이 바래버린 건 아닌가요? 혹 그 돌판이 깨뜨려져 있는 건 아닌가요? 바래버린 말씀이라면 새겨진 자리를 깨끗이 하고 글자를 분명히 새겨야 하겠고, 깨뜨려진 돌판이라면 하느님께 새로운 돌판에 다시 써주시길 청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루를 새로이 시작할 때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 마음의 돌판을 어루만져 보는 시간을 조금씩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너희의 죄악을 용서해주겠다. 하지만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두지는 않겠다!”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용서와 벌에 대한 하느님의 이런 입장은 오늘날 교회의 그것과 상충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고해성사 규정 제12조에서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죄를 없애 주지만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를 고쳐주지는 못한다. 죄에서 벗어난 사람은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실행하여야 한다.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부른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59항] 즉 우리 죄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가 있어도, 내가 저지른 죄로 인해 받아야 할 벌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과 맺는 친교를 회복하면 죄의 영벌은 면제되지만 잠벌은 남아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73항]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이 받아야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할 벌을 이 세상에서 보속으로 갚지 못할 경우, 그 죄인은 죽은 뒤에 연옥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정화를 필요로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인의 정화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회가 베푸는 ‘대사’(大赦)이지요. 이러한 이해를 통해 탈출기의 하느님께서 용서와 벌에 대해 하시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잘 와 닿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지나가시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도 있었습니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 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탈출 33,21-22) 여기서 “하느님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약을 선포할 때 그러하신 것처럼 계약을 갱신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심을 뜻합니다. 즉 일찍이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신 것처럼, 또한 당신의 영광이 그 산에 자리 잡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다시 계약을 맺으시는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계약의 재체결
“이제 내가 계약을 맺는다. 나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어떤 민족에게서도 일어난 적이 없는 기적들을 너의 온 백성 앞에서 일으키겠다. 너를 둘러싼 온 백성이 주님의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할 이 일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탈출 34,10)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고, 그에 분노한 모세는 하느님께서 새겨 주신 계명의 돌판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로써 일찍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어진 계약은 파기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반역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고, 그 백성과 다시 계약을 맺으시길 바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잘 지켜라. … 너희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탈출 34,11-14)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시면서 기존의 십계명 외에 다른 계명들을 추가로 내려주셨는데, 십계명에서 우선적으로 언급하신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3)는 말씀이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되어 강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추가된 계명들은 종교의식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예식 십계명’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존의 십계명은 ‘윤리 십계명’이라 불리고 있지요.
질투하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다시 맺으시면서 다른 신과 우상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시면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엄청난 표현을 쓰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34,14) 이는 앞서 시나이 산에서 처음 계약을 체결하시면서 십계명을 주실 때 하신 말씀에 대한 반복이기도 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이 외에도 신명기에서 3번, 여호수아기에서 1번, ‘질투하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극히 선하신 하느님께서 질투를 하시다니요? 일반적으로 질투는 “시기와 욕심에서 나오는 남을 미워하고 깎아내리는 마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연인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사랑에서 나오는 샘을 내고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즉 ‘질투하는 하느님’이란 표현은, “하느님께서는 (가나안인들이 공경하던, 풍요 다산을 관장하는) ‘아세라’와 같은 (이방의) 신을 이스라엘 백성이 경배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다른 신들을 위한 경신례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명하기를 요구하신다.”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하느님 아닌 다른 그 무엇을 당신의 자리에 두거나,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질투하는 사랑에 감사하면서, 우리도 그분의 크신 사랑에 맞갖은 사랑의 응답을 드리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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