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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1년 6개월 머무르며 말씀을 전한 코린토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19.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성경의 세계]

1년 6개월 머무르며 말씀을 전한 코린토

이창훈 알퐁소(전 평화신문 편집국장)

 

 

아테네에 머물던 바오로는 그곳을 떠나 코린토로 갑니다(사도 18,1).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80km쯤 떨어진 코린토는 기원전 4000년부터 주민이 거주한 아주 오래된 도시입니다. 기원전 500년쯤에는 인구 30만의 큰 도시로 성장했으나 기원전 146년에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됩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재건되고, 기원전 27년에는 그리스 남부 지역의 로마제국 속주인 아카이아 주의 주도(州都)가 됩니다.

 

로마인을 비롯해 그리스인, 노예,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 등 여러 계층과 민족이 뒤섞인 국제도시 코린토는 에게해로 향하는 동쪽과 아드리아해로 이어지는 서북쪽에 각각 항구를 둔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아폴로와 아프로디테 같은 그리스-로마의 신들과 바다의 여신 이시스, 치유의 신 세라피스 등 동방 종교의 신들을 모신 신전도 많았습니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모신 신전에서는 매음이 성행해 성적 문란도 극심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바오로는 바로 이런 도시에 복음을 전하려고 들어온 것입니다.

 

 

많은 코린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다

 

코린토에 온 바오로는 먼저 천막 짜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찾아갑니다. 이들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재위 41-54)의 칙령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부부였습니다. 바오로가 이들을 찾아간 것은 유다인이고 생업이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이들이 바오로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호의적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하면서 안식일이 되면 회당으로 가서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애씁니다(사도 18,2-4).

 

그러는 사이에 베로이아에 남아 있던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내려와 합세하면서 바오로는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며 오히려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합니다”라고 라고 말하며 회당 옆 티티우스 유스투스의 집으로 갑니다. 티티우스 유스투스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지만 유다인이 아니었음을 바오로의 말에 비춰 짐작할 수 있습니다(사도 18,5-7).

 

유다인들에게 배척당했으나,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에서는 몇몇 사람만이 믿게 되었지만(사도 17,34), 코린토에서는 회당장 크리스포스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됐을 뿐 아니라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코린토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사도 18,8). 그들 가운데는 유식하고 가진 것 많은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1코린 1,26 참조).

 

 

재판정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모독과 배척이 바오로의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사실 바오로가 마케도니아 곧 테살로니카와 베로이아를 떠난 것도 유다인들의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바오로에게 환시 중에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하고 격려하십니다. 그 환시 말씀에 힘입어 바오로는 1년 6개월 동안 코린토에서 지내면서 하느님 말씀을 전합니다(사도 18,9-11).

 

결국 코린토에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기원후 65)의 동생인 갈리오가 아카이아 총독으로 지내던 50년대 초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들고 일어나 바오로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 ‘법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하느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긴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유다교와 유다인들의 율법까지도 법으로 인정해주었기에 유다인들은 이렇게 고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총독 갈리오는 ‘예수에 관한 말이나 명칭이나 율법과 관련된 것이면 여러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며 유다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냅니다(사도 18, 12-16)

 

그러자 “모두” 회당장 소스테네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매질합니다(사도 18,17). 회당장 소스테네스는 앞에서 언급한 회당장 크리스포스의 후임일 수도 있고, 아니면 크리스포스와 함께 회당장 직분을 맡은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소스테네스를 매질한 사람들이 모두 유다인을 가리킨다면, 그들은 소스테네스가 크리스포스와 마찬가지로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반감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재판정에 있던 유다인들뿐 아니라 비유다인들도 함께 가리킨다면, 코린토의 비유다인들이 유다인들에 대한 반감에서 소스테네스를 매질하는 데 합세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바오로를 박해하려던 코린토 유다인들의 시도는 허사가 됐고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머무르다가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갑니다(사도 18,18).

 

 

- ‘베마’라고 불리는 재판정 자리. 뒤에 보이는 바위산등성이 지역이 아크로코린토(좌), 코린토 지협의 코린토 운하(우)

 

코린토 신자들에 대한 바오로의 관심과 염려를 보여주는 코린토 서간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1년 6개월이나 머물며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은 번영과 환락의 도시 코린토에 하느님 말씀이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그만큼 많은 공을 들였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코린토 교회에 대한 바오로의 관심과 염려가 그만큼 깊고 크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불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바오로의 서간 중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두 편이나 된다는 것도 이를 방증합니다.

 

그런데 바오로의 코린토 방문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3차 선교여행 때에 마케도니아를 거쳐 그리스에서 석 달을 지냈다고 전하는데(사도 20,3), 이 그리스에서 바오로가 주로 체류한 곳이 코린토였고, 이때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썼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바오로가 1년 6개월이나 지내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 후에도 3개월 가까이 머문 코린토는 3세기 이후 외세의 침략과 지진 등으로 차츰 쇠락해졌고 오늘날 관광객과 순례객이 찾는 유적과 박물관이 옛 명성을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완공된 코린토 운하는 동쪽의 에게해와 서북쪽의 아드리아해를 연결하면서 지역의 또 다른 볼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코린토 고대 유적지를 찾는 순례객들은 멀리 뒤로 ‘아크로코린토’라고 불리는 산등성이의 고대 코린토, 아폴로 신전, 아드리아해의 레카이온 항구로 향하는 레카이온 도로. 그리고 그 주변의 유적들을 통해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 활동을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 유적지 도로 옆에 있는 ‘베마’라고 불리는 연단은 당시 재판정으로 사용되던 곳이어서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재판정에 끌고 가 고발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