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 못난 아들 감싸 안은 아버지 주님 사랑은 이런 것 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 제2독서 2코린 5,17-21 복음 루카 15,1-3.11ㄴ-32 가톨릭신문 2022-03-27 [제3287호, 24면]
돌아온 자식 맞이하는 부친 모습 그려낸 명화 인간을 보호해주시는 하느님 사랑과 축복 의미 인생의 목적은 모두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1~1669년).
복음의 정수(精髓)요 핵심인 탕자의 귀향
하느님의 연인(戀人) 헨리 나웬 신부(1932~1996)가 빛과 어둠의 마술사 렘브란트(1606~1669)의 걸작 ‘탕자의 귀향’을 접한 후, 깊이 감상하고 묵상하게 된 과정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1983년 헨리 나웬이 51세가 되던 해, 시몬이란 친구를 방문했다가, 사무실 안쪽 문에 붙어있는 복사판 그림 한 장을 보게 됐는데, 바로 탕자의 귀향이었습니다. 처음 접했을 때의 강렬한 느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자주색 망토를 넉넉하게 걸친 남자가 남루한 차림으로 무릎을 꿇은 소년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 반사되는 황금빛, 그리고 두 존재를 한꺼번에 휘감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느낀 적이 없는 감동을 주었던 건 무엇보다도 소년의 어깨를 감싸 쥔 노인의 두 손이었습니다.”
사실 헨리 나웬이 탕자의 귀향을 처음 대면했던 시기, 그는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막 마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아메리카의 비참한 현실과 불의를 청중들 앞에서 폭로할 때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우자고 연단에서 외칠 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일정이 끝나고 텅 빈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 치마폭에 매달려 엉엉 울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처럼 나약해졌습니다.
헨리 나웬은 그렇게 탈진해있던 상태에서 탕자의 귀향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는 만사 제쳐놓고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품에 푹 안기고 싶었답니다.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곳, 아버지 집처럼 편안한 곳에서 아무 생각 없이 두 다리 쭉 뻗고 쉬고 싶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 ‘새벽’의 일원이 됩니다.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그의 간절한 갈망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새벽 공동체로 건너가기 전 헨리 나웬은 탕자의 귀향 진품을 관람하기 위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예르미타시 미술관을 방문합니다. 그림 안에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 외에 4명의 인물이 더 등장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들은 관찰자요 방관자, 구경꾼들입니다. 그는 자신 역시 오랜 세월 동안 관찰자요 방관자, 구경꾼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그분 품 안에 꼭 안기고 싶어 합니다.
“저도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분의 가슴에 귀를 바짝 들이댄 후,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랜 시간 아버지 심장의 그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탕자의 귀향을 앞에 두고 묵상하던 헨리 나웬은 그 작품이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란 생각이 점점 짙어졌습니다. 하느님이 그에게 들려주시려는 말씀의 핵심뿐만이 그 작품 안에 다 담겨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림 안에 복음의 정수, 핵심, 총 요약이 들어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탕자의 귀향에 대한 헨리 나웬식 묵상의 결론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 아들, 그리고 첫째 아들, 최종적으로 아버지, 세 인물이 공존합니다. 탕자의 귀향 스토리는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넘어가고,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죽을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둘째 아들을 다독여주며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너그럽고 지혜로운 한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손입니다. 두 손의 크기가 우선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왼손은 강하고 억셉니다. 마디마디에 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고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귀부인의 손가락처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손을 사뿐히 올려놓은 듯합니다.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면서도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붙잡아 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버지가 걸치고 계시는 큼지막한 외투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색상이 따뜻하고 고운데다 큼지막합니다. 모양도 아치를 닮아서 깃들이기 좋은 환영의 공간입니다. 세상에 지친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장막처럼 보입니다. 헨리 나웬은 특별한 표현을 합니다.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 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결국 아버지의 커다란 망토는 보살핌과 보호 속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존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극진히 환대하고 있습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정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를 꽉 움켜쥐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과연 돌아온 탕자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인가? 파악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그게 아니라고 외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 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둘째 아들에서 첫째 아들로, 첫째 아들에서 아버지로 옮겨가고 변환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꽤 먹은 헨리 나웬의 고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헨리 나웬의 「탕자의 귀향」(포이에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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