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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소연 시인 / 백색소음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

이소연 시인 / 백색소음

 

 

주방을 옮기지 못하고 나는 그릇을 골라냈다

그릇은 흩어지기 위해 모여있다

그릇은 깨어지기 위해 모여있다

그릇이 쌓여 나보다 오래 가정을 지킨다

그토록 많은 그릇이 깨져도

멸종되지 않는 오목한 세계

품을 수 있는 세계에 종말이란 없다는 듯

포개진 그릇들의 둥근 바닥마다

인간에게서 빼앗은 목줄을 감추고 있다

꽃이 있는 그릇을 가져다주렴

나무가 있는 큰 접시를

새가 있는 작은 종지를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마음이 생긴다

그릇이 나를 골라낸다

하지를 지나는 감자처럼

그릇이 내게 마음을 들킨다

6월은 5월보다 할 일이 많아

아침저녁으로 물방울이 창에 맺혔다

당신은 장마가 온 걸 알아채지 못했다

옆집 개가 화장실 벽을 긁는다

그릇을 버렸다

따뜻한 스튜처럼 떠먹기 좋은 마음들

골라내는 일에는

강한 어깨가 소용없다

나는 그릇을 씻다 말고

낮잠을 자러 갔다

금 간 것은 벽도 아니고 그릇도 아니고

잠결에 듣는 심장 두 개

 

ㅡ『서정시학』2022년 여름호

 

 


 

이소연 시인

1983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同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산문집으로 『고라니라니』가 있음. 현재 '켬'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