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시인 / 백색소음
주방을 옮기지 못하고 나는 그릇을 골라냈다 그릇은 흩어지기 위해 모여있다 그릇은 깨어지기 위해 모여있다 그릇이 쌓여 나보다 오래 가정을 지킨다 그토록 많은 그릇이 깨져도 멸종되지 않는 오목한 세계 품을 수 있는 세계에 종말이란 없다는 듯 포개진 그릇들의 둥근 바닥마다 인간에게서 빼앗은 목줄을 감추고 있다 꽃이 있는 그릇을 가져다주렴 나무가 있는 큰 접시를 새가 있는 작은 종지를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마음이 생긴다 그릇이 나를 골라낸다 하지를 지나는 감자처럼 그릇이 내게 마음을 들킨다 6월은 5월보다 할 일이 많아 아침저녁으로 물방울이 창에 맺혔다 당신은 장마가 온 걸 알아채지 못했다 옆집 개가 화장실 벽을 긁는다 그릇을 버렸다 따뜻한 스튜처럼 떠먹기 좋은 마음들 골라내는 일에는 강한 어깨가 소용없다 나는 그릇을 씻다 말고 낮잠을 자러 갔다 금 간 것은 벽도 아니고 그릇도 아니고 잠결에 듣는 심장 두 개
ㅡ『서정시학』2022년 여름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명길 시인 / 초연히 홀로 외 1편 (0) | 2023.05.01 |
---|---|
김진희 시인(여주) / 낮은음자리표 외 1편 (0) | 2023.05.01 |
배창환 시인 / 꽃 외 1편 (0) | 2023.05.01 |
김진희 시인(교수) / 바람이 분다 외 1편 (0) | 2023.05.01 |
박시영 시인 / 거울의 바깥에서 (0) | 2023.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