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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진희 시인(교수) / 바람이 분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

김진희 시인(교수) /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골목은 쓰라리다

바람처럼 사람들이 스쳐간다

어둔 거리 숱한 얼굴들 이름 없이 사라진다

바쁘게 사라지는 그들의 등뒤 그림자만 남는다

그림자들 모여 안개가 핀다

안개에 갇힌 절규 소리를 잃는다

두절된 소리의 유배지

교신을 위한 주파수가 범람한다

너도 나도 돌리는 채널의 잡음 속

모두의 사연들 무산된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매몰된 비명을 암장하고

은폐된 골목은 더욱 쓰리다

오늘따라 바람이 거세다

 

 


 

 

김진희 시인(교수) / 폭우의 음모

 

 

비가 내렸어 도시 위에

건물들이 젖고

젖은 길 위를 달리는 차도 젖고

젖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사람들도 젖고

젖은 사람들의 발목이 젖고

젖은 발목들이 건물로 뛰어들었어

 

비는 언제나 밖에서만 내리지

 

오늘 사막에 때아닌 폭우가 내렸다더군

수천 명이 지붕 없는 방에서 비를 맞는다고 해

수천 명이 빗살에 휩쓸려 갔다고도 하더군

그리고 오늘 건물 안에선 몇 명이

은밀한 비밀을 나누었다고 해

상관없어 비속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바뀌지 않는 신호등을 기다리며

차들이 줄줄이 멈춰서 있어

사막으로 가는 길이 범람했다더군

지워진 길 위로 낙타들이 떠다닌다더군

사람들이 속삭였어

상관없어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야

 

비는 언제나 밖에서만 내리지

 

내일은 비가 그치겠지만

내일은 여간해선 오지 않아, 올까?

 

 


 

김진희 시인(교수)

1956년생. 이화여대. 미 트루대에서 박사학위(철학박사), 교수, 詩 <진달래 연작>으로 <여성신문사 주최><제3회  여성문학상>수상 등단. 시사랑사람들 동인 시인/자문교수단 시인. 시집 『가슴의 불길 감출 수 없는 때』(여성신문사,1993) 外 다수의 평론집 및 저작.작품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