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영 시인 / 거울의 바깥에서
낡은 거울을 오래 닦은 후에 안다
살아 있는 줄만 알았던 시간 어린 날 해마다 조사하던 장래희망 연필은 많이도 서성거렸지
견고한 태양 쪽으로 줄 서는 일 끝없이 불씨를 살리는 차가운 걸음이었다
깨진 거울 속에 펼쳐진 풍경의 균열 사이로 강과 바다에서 동그랗게 자라난 오래된 어둠 물안개로 퍼져나갔다
비를 피하는 우리의 시간은 꿈의 날개가 부려놓고 앞서간 해진 신발이 뿌려놓은 씨앗들 질척한 땅 깊숙이 죽은 듯 엎드렸을 뿐
어느 때인가 깊은 물이 침묵에 이르듯 우산 아래 흩어져간 빗물로 걷는 길 촉촉한 대지는 연둣빛 풍경 피워 올리고
낡아서 맑아진 얼굴 하나 긴 겨울의 슬픔에 얼려놓은 강을 두드려 수줍고 단단해진 근육으로 오고 가는 계절 초록이 주름지는
ㅡ『다층』, 202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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