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 시인 / 초연히 홀로
설악산 구름밭에 올라앉은 용아장성 바위처럼 초연하게 홀로 볼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들을 수 있는 것 조금 버려둔 채 그저 초연히 홀로
이름 안 알려졌지만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맛 볼 수 있는 것 조금 할 일도 조금은 남겨둔 채 초연히 홀로
밤하늘 별들 중 너무 반짝이는 건 말고 너무 흐린 것도 말고 황소자리 한쪽 구석에서 눈에 뜨이는 듯 만 듯 잠깐 그렇게 초연히 홀로
속상한 것 모두 드러내지는 말고 잠시 눈 흘기는 것만으로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 낮게 그저 시는 말도 모두 다 뱉어내지는 말고
최명길 시인 / 돌거북이가 물어다 준 시
대해에는 거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도나 커 등짝이 꼭 섬 같았습 니다. 하루는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해적선이 이 섬에 닻을 내리고 해 적들은 밥을 해 먹으려고 솥을 걸고 장작불을 지폈습니다. 화끈한 불 기운에 깜짝 놀란 이 거북이 그만 슬그머니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해적들은 그제서야 섬이 아니라 거북인 줄 깨닫고 발광하며 날뛰었으나, 금은보화도 해적들도 모두 그 대해가 삼켜버렸습니다.
천진에는 거북처럼 생긴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1969년 초가을 나는 이 거북바위에 엎드려 시를 썼습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를 썼습니다. 북양의 갈매기가 바다의 하얀 배를 부비며 날아드는 정경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몇 번 투고를 했으나 연거푸 감감무소식이었던 그 시절 나는 나를 원망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 꿈틀거리는 바다와 휘몰려드는 내 내면의 폭풍소리를 듣는 순간 문득 시가 튀어나왔더랬지요. 그런데 그 시가 덜컥 내 등단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성 천진 돌거북이가 물어다 준 시.
2013년 9월21일 나는 아내와 그 거북바위를 찾아갔습니다. 돌거북이가 궁금해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괴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쇠말뚝이 등짝을 뚫고 몸뚱아리는 철조망에 휘가며 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가여워 터벌어진 등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꺼질듯한 신음소리가 우주법계에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새끼 거북이들이 어서 용궁으로 돌아가자고 괴물로 변한 즈이 에미 발등을 붙잡고 칭얼거렸습니다. 나도 덩달아 칭얼거렸습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진희 시인(시조) / 견고한 잠 외 3편 (0) | 2023.05.01 |
---|---|
문신 시인 / 독작 獨酌 외 1편 (0) | 2023.05.01 |
김진희 시인(여주) / 낮은음자리표 외 1편 (0) | 2023.05.01 |
이소연 시인 / 백색소음 (0) | 2023.05.01 |
배창환 시인 / 꽃 외 1편 (0) | 2023.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