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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명길 시인 / 초연히 홀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

최명길 시인 / 초연히 홀로

 

 

설악산 구름밭에 올라앉은

용아장성 바위처럼 초연하게 홀로

볼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들을 수 있는 것 조금 버려둔 채

그저 초연히 홀로

 

이름 안 알려졌지만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조금 남겨둔 채

맛 볼 수 있는 것 조금

할 일도 조금은 남겨둔 채

초연히 홀로

 

밤하늘 별들 중 너무 반짝이는 건 말고

너무 흐린 것도 말고

황소자리 한쪽 구석에서

눈에 뜨이는 듯 만 듯 잠깐

그렇게 초연히 홀로

 

속상한 것 모두 드러내지는 말고

잠시 눈 흘기는 것만으로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

낮게 그저 시는 말도

모두 다 뱉어내지는 말고

 

 


 

 

최명길 시인 / 돌거북이가 물어다 준 시

 

 

 대해에는 거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도나 커 등짝이 꼭 섬 같았습 니다. 하루는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해적선이 이 섬에 닻을 내리고 해 적들은 밥을 해 먹으려고 솥을 걸고 장작불을 지폈습니다. 화끈한 불 기운에 깜짝 놀란 이 거북이 그만 슬그머니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해적들은 그제서야 섬이 아니라 거북인 줄 깨닫고 발광하며 날뛰었으나, 금은보화도 해적들도 모두 그 대해가 삼켜버렸습니다.

 

 천진에는 거북처럼 생긴 거북바위가 있습니다. 1969년 초가을 나는 이 거북바위에 엎드려 시를 썼습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를 썼습니다. 북양의 갈매기가 바다의 하얀 배를 부비며 날아드는 정경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몇 번 투고를 했으나 연거푸 감감무소식이었던 그 시절 나는 나를 원망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생명 꿈틀거리는 바다와 휘몰려드는 내 내면의 폭풍소리를 듣는 순간 문득 시가 튀어나왔더랬지요. 그런데 그 시가 덜컥 내 등단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성 천진 돌거북이가 물어다 준 시.

 

 2013년 9월21일 나는 아내와 그 거북바위를 찾아갔습니다. 돌거북이가 궁금해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거북이는 괴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쇠말뚝이 등짝을 뚫고 몸뚱아리는 철조망에 휘가며 형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가여워 터벌어진 등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꺼질듯한 신음소리가 우주법계에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새끼 거북이들이 어서 용궁으로 돌아가자고 괴물로 변한 즈이 에미 발등을 붙잡고 칭얼거렸습니다. 나도 덩달아 칭얼거렸습니다.

 

 


 

최명길 시인(1940~2014)

1940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1959년 강릉사범학교 졸업. 1989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75년 《현대문학》에 시〈자연서경〉,〈해역에 서서〉,〈음악〉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화접사』,『풀피리 하나만으로』, 『반만 울리는 피리』, 『은자, 물을 건너다』, 『콧구멍 없는 소』, 『하늘 불탱』과 명상시집 『바람속의 작은 집』이 있음. 홍조근정훈장, 강원도문화상<문학부문> 수상. 2014년 5월 별세.(향년 7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