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희 시인(시조) / 견고한 잠
면사무소 휘휘 돌아 납작한 외딴섬에 열여섯에 시집와서 칠십년 산 큰어머니 구십 도 꺾인 허리를 땅속에서 펴신다
그날 그 후, 아래채도 무릎 꺾여 쓰러졌다 탄알이 후둑후둑 쏟아지는 한밤중에 한숨도 못 잔 담벽이 포격에 무너졌다
몸보다 허한 마음 서둘러 찾아가는 내 안의 정류장에 기다리는 사람 없어 빛바랜 가족사지만 소리없이 웃을 뿐
빈집에는 그늘처럼 적막이 쉬고 있다 눈을 뜨다 감았다 꽃잎이 피고 지고 낭자한 풀벌레 소리 파도처럼 일렁인다
김진희 시인(시조) / 무화과
1. 무얼까 이 두근거림은 그가 건넨 하늘 한 량
서투른 첫사랑이 꽃 피우지 못할 예감
속에서 활활 타는 듯 불덩이가 보인다
2. 애써 삼킨 못 다한 말 그 말에 목숨 걸고
탱탱이 버팅기다 뭉개지고 허물어진
지하도 좌판 위에서 엎드린 중년의 생
김진희 시인(시조) / 소나무와 아버지
신방리 오름길에 늙고 병든 소나무 기역자 허리 굽혀 세상에다 절을 하네 링거를 팔에 꼽은 채 살아서 죄송하다고 오밤중 옥상으로 오르시던 아버지 젊어서 집안 곳곳 새는 물길 다 잡아 놓고 희수에 오줌 새는 밤이 미안타고 부끄럽다고
김진희 시인(시조) / 거북이
아빠, 왜 거북이는 느릿느릿 기어가요?
등껍질이 무거워서 걷기에 힘든가봐
동생은 아빠 등에서 슬몃 내려 앉는다
-동시조집 『선물』, 목언예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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