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진희 시인(시조) / 견고한 잠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

김진희 시인(시조) / 견고한 잠

 

 

면사무소 휘휘 돌아 납작한 외딴섬에

열여섯에 시집와서 칠십년 산 큰어머니

구십 도 꺾인 허리를 땅속에서 펴신다

 

그날 그 후, 아래채도 무릎 꺾여 쓰러졌다

탄알이 후둑후둑 쏟아지는 한밤중에

한숨도 못 잔 담벽이 포격에 무너졌다

 

몸보다 허한 마음 서둘러 찾아가는

내 안의 정류장에 기다리는 사람 없어

빛바랜 가족사지만 소리없이 웃을 뿐

 

빈집에는 그늘처럼 적막이 쉬고 있다

눈을 뜨다 감았다 꽃잎이 피고 지고

낭자한 풀벌레 소리 파도처럼 일렁인다

 

 


 

 

김진희 시인(시조) / 무화과

 

 

1.

무얼까 이 두근거림은

그가 건넨 하늘 한 량

 

서투른 첫사랑이

꽃 피우지 못할 예감

 

속에서 활활 타는 듯 불덩이가 보인다

 

2.

애써 삼킨 못 다한 말 그 말에 목숨 걸고

 

탱탱이 버팅기다

뭉개지고

허물어진

 

지하도 좌판 위에서

엎드린 중년의 생

 

 


 

 

김진희 시인(시조) / 소나무와 아버지

 

 

신방리 오름길에 늙고 병든 소나무

기역자 허리 굽혀 세상에다 절을 하네

링거를 팔에 꼽은 채

살아서 죄송하다고

오밤중 옥상으로 오르시던 아버지

젊어서 집안 곳곳 새는 물길 다 잡아 놓고

희수에 오줌 새는 밤이

미안타고 부끄럽다고

 

 


 

 

김진희 시인(시조) / 거북이

 

 

아빠, 왜 거북이는 느릿느릿 기어가요?

 

등껍질이 무거워서 걷기에 힘든가봐

 

동생은 아빠 등에서 슬몃 내려 앉는다

 

-동시조집 『선물』, 목언예원, 2022.

 

 


 

김진희 시인(시조)

1957년 경남 진해 출생. 마산교육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 창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9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문학> 2회 천료. 시조집 <내마음의 낙관> <바람의 부족部族>. 시선집 <슬픔의 안쪽>. 동시조집 <선물>.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수상. 밀양 예림초등학교 교장, 현재 경남문협 사무차장과 경남여류문학회 부회장. 현) 한국문인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