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만 시인 / 길
지렁이 한 마리가 비 그친 직지사 극락교를 건너간다
한쪽 발을 시멘트 바닥에 고정시키고
나머지 한쪽 발을 오래오래 절 밖으로 들어올린다
그 사이로 해와 달이 지나가고 진입로가 서너 번 굽었다 펴진다
더럽고 먼 길,
내려놓을 수도 떠내려 보낼 수도 없는 다리 위 길 하나가
허공에 철사처럼 구부러져 녹슨다
심창만 시인 / 침묵의 지평선
태양이 게워내고 심연이 돌아누울 때
내 등을 토닥여준 텅 빈 그대여
심창만 시인 / 베트남제 오리털 점퍼
이 옷은 헐었다 나를 입고도 떨고 있다 임실 버스 터미널 구석에 한 여자도 떨고 있다 나와 같은 격자무늬 점퍼를 입고 가로로 세로로 여기까지 떠내려 와 같은 위도에 무릎을 웅크리고 있다 월남치마를 입던 오래 전 누이처럼 그녀의 무릎이 얇고 낯익어 가만가만 내 무릎도 떨린다 낯선 물살에 놀란 오리처럼 그녀가 두리번거린다 남국의 이마를 닮아 그녀의 점퍼도 검게 식었다 월남치마 밑으로 메콩강이 흐를까 숨긴 두 발을 쉴 새 없이 헤엄쳐 그녀는 이 춥고 불안한 이국의 버스 터미널에 잠시 떠 있는 것이다 헐값에 팔리는 고향의 제 깃털들을 이렇게 타국의 비싼 점퍼로 되사 입고도 덜덜 떨고 있는 베트남 여자 앞에서 내 오리털 점퍼도 입술이 헐고 이마가 식어 덜덜 떨고 있다 계간 『포엠포엠』 201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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