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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창만 시인 / 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1.

심창만 시인 / 길

 

 

지렁이 한 마리가

비 그친

직지사 극락교를 건너간다

 

한쪽 발을

시멘트 바닥에 고정시키고

 

나머지 한쪽 발을

오래오래

절 밖으로 들어올린다

 

그 사이로

해와 달이 지나가고

진입로가 서너 번 굽었다 펴진다

 

더럽고 먼 길,

 

내려놓을 수도

떠내려 보낼 수도 없는

다리 위

길 하나가

 

허공에

철사처럼 구부러져

녹슨다

 

 


 

 

심창만 시인 / 침묵의 지평선

 

 

태양이 게워내고 심연이 돌아누울 때

 

내 등을 토닥여준 텅 빈 그대여

 

 


 

 

심창만 시인 / 베트남제 오리털 점퍼

 

 

이 옷은 헐었다

나를 입고도 떨고 있다

임실 버스 터미널 구석에

한 여자도 떨고 있다

나와 같은 격자무늬 점퍼를 입고

가로로 세로로 여기까지 떠내려 와

같은 위도에 무릎을 웅크리고 있다

월남치마를 입던 오래 전 누이처럼

그녀의 무릎이 얇고 낯익어

가만가만 내 무릎도 떨린다

낯선 물살에 놀란 오리처럼

그녀가 두리번거린다

남국의 이마를 닮아

그녀의 점퍼도 검게 식었다

월남치마 밑으로 메콩강이 흐를까

숨긴 두 발을 쉴 새 없이 헤엄쳐

그녀는 이 춥고 불안한 이국의 버스 터미널에

잠시 떠 있는 것이다

헐값에 팔리는 고향의 제 깃털들을

이렇게 타국의 비싼 점퍼로 되사 입고도

덜덜 떨고 있는 베트남 여자 앞에서

내 오리털 점퍼도

입술이 헐고 이마가 식어

덜덜 떨고 있다

계간 『포엠포엠』 2013년 봄호 발표

 

 


 

심창만 시인

1961년 전북 임실에서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 1988년 《시문학》 우수작품상 수상. 1997년 계간 《문학동네》로 본격적인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무인등대에서 휘파람』(푸른사상, 2012)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