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임 시인 / 황홀한 폐허
치명이다 슈퍼 푸드가 주는 달콤함에 빠져 파헤쳐버린 열대우림 호모 사피엔스의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이다
평형기능이 무너졌다 나도 모르게 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를 무너뜨린다
내가 뻗어나간다 뿌리에 뿌리를 내리고 영역을 넓혀간다 매머드나 왕아르마딜로 같은 거대 동물이 사라진 자리에 맞이한 멸종을 간신히 벗어난 내가 새롭게 맞이한 세계
나를 위해 땅을 파헤쳐놓는다 빽빽이 들어찬 나무를 제거하고 야생동물을 제거한다 단숨에 베어버리거나 뽑거나 불을 지르는 그 야만에 울려 퍼지는 비명들
기우뚱 세계가 기울어진다 내가 제공하는 열매를 더 많이 원하는 사람들 높고 크게 자라는 나의 세계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점점 더 비대해져 가는 나는 물을 최대한으로 끌어들인다 나의 흡수에 다른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점점 더 메말라가는 열대우림의 사막화
내가 매다는 과육을 수확한 사람들이 부드럽고 고소한 맛과 몸에 좋은 다량의 불포화지방산에 목숨을 걸고 판매에 판매를 거듭한다 그 황홀한 이익에 이익을 더하는 나를 싣고 머나먼 항해를 하는 시간 속 배들이 내뿜는 환경오염 물질들
오늘도 잘려나간다 아보카도라 불리는 나의 과육을 위한 저 사람들이 파헤치는 거대한 열대우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숨을 쉬어야 할 지구가 머지않아 멈출 가쁜 숨을 몰아쉰다
서정임 시인 / 샵티*를 생각하는 저녁
오늘도 나 아닌 내가 죽었다 하루가 죽었다 무너지는 무덤 솟아나는 얼굴 간신히 숨통 트인 염소의 하루가 살았다
저녁을 먹는다 식탁 위에 무릎을 접은 길이 놓인다 뽑힌 말뚝이 놓인다
나 대신 오늘을 살았던 나 아닌 나를 생각한다 나를 향해 쏟아놓던 상사의 번득이는 눈알과 내 앞에 내팽개쳐지던 서류들 그 반경을 벗어날 수 없는 나는 그들이 파놓는 무덤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숨이 막혔다 매에 애 울어도 소리 나지 않는 울음이 꾹꾹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마다 내가 만들어 놓는 나 아닌 내가 체념한 그 타협의 순간들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든다 내일을 살아줄 나 아닌 나는 눈코 입귀가 오늘과 다르다 매일매일 그들에게 보일 모습이 다르다 내 하루를 살아줄 내 하루를 죽여줄 내 인형들
나 아닌 내가 식탁 위에 주르륵 놓인다
*고대 무덤 속 부장물로 주인 대신 일하는 노예 인형
-시집 『아몬드를 먹는 고양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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