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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진 시인 / 정중한 대화 외 1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5.

송진 시인 / 정중한 대화

 

 

이 의자는 나의 시선을 방해하는 자

저리 가줄래

마음속으로 너를 움직인다

너는 내 마음을 읽는 시간이 부족한 채로 나의 손에 등 떠밀려

우양우

좌양좌

 

혹은 우향우 좌향좌

 

이 둥글레차는 새벽의 불길을 받고 태어난 양 두 마리

입술에 가져가기도 전에

아, 뜨거워

용의 열기를 훅 뿜는

나는 너의 마음을 읽기도 전에

마우스를 움직이고 자판을 두드린다

 

양과 용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나는 양에 용 세 마리 건다

너는 용에 양 다섯 마리 건다

 

내기는 일생에 도움이 안 돼

 

노름의 사슬에 끌려다니던

 

너와 내가 도움 되려고 숨쉬고 산 건 아니니까

 

저 안경은 내 목을 중독시키는 바다의 출렁거림

알았어 라고 끝까지 말할 때까지

내 식도에 소금물을 무한대로 퍼붓는

잔인한 속성을 가진 양떼들

 

저 음악은 육체를 쉬어가게 하는 그네

지친 육체여 다시는 눈을 뜨지 말아라

이건 뭐지

진정한 화해와 위로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꽃병들이 식탁 모서리로 떨어지고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고 식탁에 의젓하게 앉은

상어알 부부는 전채요리에 대한 기대로 들뜬 콧방울이 충만해 보여

 

 


 

 

송진 시인 / 바람

 

 

 힘들 때는 단어를 거꾸로 부르지 그러면 마음이 조금 고요해져 람바 람바 람바 상처는 오래된 거야 아마 태어나기 직전, 태어나고 바로일지도 아버지는 간디스토마였지 내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병 낫게 해달라고 빌었대 아버지는 병 나았지 아버지는 병 나았지 나는 평생 그 빚 갚느라 세상의 구덩이란 구덩이는 다 메우고 있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병을 얻었지 그래도 죽지도 않아 아직 더 파야하는 구덩이가 있대 더 이상 업을 짓지 말자 별을 한 마리 데려다 키우자는 네 말에 람바 람바 람바 사는 건 새벽의 흰 욕조에 기어오르는 흰 아기 거미를 휴지로 둘둘 말아 옥상에서 떨어뜨리는 아슬아슬하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낭만적인 노을의 기지개

 

-시집 『복숭앗빛 복숭아』에서

 

 


 

송진 시인

1962년 부산에서 출생. 1999년 《다층》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 『시체 분류법』 『미장센』 『복숭앗빛 복숭아』 『방금 육체를 마친 얼굴처럼』 『플로깅』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