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순 시인 / 혼합구역
그해 봄이 오다 말았지만 그건 이 구역에서 흔한 일
내겐 과일 바구니를 짤 줄 아는 손이 있고 뿌리 달린 오토바이는 어디든 누비고 다녔죠
라일락꽃 떨어진 곳에 밀감이 열리고 올리브를 따는 사다리에서 쥘 르나르는 외쳤어요
-뱀은 길다
구불거리는 열매를 바구니에 담으며
걱정했어요 여기가 마지막 주유소라는 말
기름이 가득 들었는데도 떨었잖아요 해변 앞 상점이었고 그곳을 지날 때면 누구나 연료 게이지를 쳐다본다는 것 남아 있는 기쁨을 우유갑처럼 흔들며
-다른 걸 보여주시겠어요
체크무늬 스커트를 고를 때 줄이 안 맞는다 투정 부리면 곤란해요 실들도 가끔은 비뚤어지고 싶을 테니까요
봄이 굴러떨어지려는 거겠죠 수리점에 오토바이를 맡기고 나올 때 발을 헛디디는 이유 지났던 길을 돌아갈 때 세상이 찌그러진 것 같아서
오로라는 초록 라자냐에요 지붕은 코뿔소예요 그런데
마지막이라는 건 어떤 무늬일까요
불붙은 기름통을 싣고 오토바이가 체크무늬 속을 지그재그 달려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건 이 구역에서 매우 흔한 일이에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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