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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지관순 시인 / 혼합구역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5.

지관순 시인 / 혼합구역

 

 

그해 봄이 오다 말았지만 그건 이 구역에서 흔한 일

 

내겐 과일 바구니를 짤 줄 아는 손이 있고

뿌리 달린 오토바이는 어디든 누비고 다녔죠

 

라일락꽃 떨어진 곳에 밀감이 열리고

올리브를 따는 사다리에서

쥘 르나르는 외쳤어요

 

-뱀은 길다

 

구불거리는 열매를 바구니에 담으며

 

걱정했어요

여기가 마지막 주유소라는 말

 

기름이 가득 들었는데도

떨었잖아요 해변 앞 상점이었고

그곳을 지날 때면 누구나 연료 게이지를 쳐다본다는 것

남아 있는 기쁨을 우유갑처럼 흔들며

 

-다른 걸 보여주시겠어요

 

체크무늬 스커트를 고를 때

줄이 안 맞는다 투정 부리면 곤란해요

실들도 가끔은 비뚤어지고 싶을 테니까요

 

봄이 굴러떨어지려는 거겠죠

수리점에 오토바이를 맡기고 나올 때 발을 헛디디는 이유

지났던 길을 돌아갈 때 세상이 찌그러진 것 같아서

 

오로라는 초록 라자냐에요

지붕은 코뿔소예요

그런데

 

마지막이라는 건 어떤 무늬일까요

 

불붙은 기름통을 싣고

오토바이가 체크무늬 속을 지그재그 달려도

걱정하지 말아요

그건 이 구역에서 매우 흔한 일이에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3월호 발표

 

 


 

지관순 시인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제 32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우수상 수상. 제 15회 안산 전국여성 백일장 장원. 제10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2015년 《시산맥》으로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