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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임희구 시인 / 굳은살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6.

임희구 시인 / 굳은살

 

 

가슴에 돋은 굳은 살 눈물에 돋은 굳은살

굳은살에 돋은 굳은살 생살은 말고 굳은살로만

굳은살도 말고 돋은살에 돋은 굳은살로만

굴러먹고 굴러먹어서 굳은살만 뚝뚝 돋아가지고

웬만한 굳은살로는 턱도 없어

웬만한 굳은살 말고 웬만하지 않은 굳은살로만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세상에 굴러먹을 수 있는

굳은살로만

그런 것들로만 들끓게 하소서 펄펄 끓게 하소서

이런 세상이 오기 전에 이른 아침부터

꽃씨 사러 가는 하느님 가슴에도 돋은 굳은살

 

 


 

 

임희구 시인 / 봉숭아 꽃물

 

 

오십을 바라보는 형과 형수가

마주앉아 봉숭아꽃물을 들입니다.

형은 약지와 새끼손가락에

형수는 열 손가락 모두

봉숭아꽃물을 싼 비닐종이를 실로 칭칭 동여매고

형수가 불안한 손가락으로 삼겹살을 굽습니다

서로 닿지 않도록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벌리고

천장 보며 누워 있던 형이 날 보고

소년처럼 사르르 웃습니다.

다 구운 삼겹살을 담아내온 접시에

형수의 손에서 흘러나온 봉숭아 꽃물이

붉게 묻어 있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 철도 없이

꽃물 들어 일렁이는 가을 저녁

새하얀 첫눈이 내릴 것만 같습니다

 

 


 

 

임희구 시인 / 머리를 빡빡 민

 

 

머리를 빡빡 민 옷은 스님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깍두기 같은 한 무리의 졸개들이 행사장 무대에서 출구쪽으로 쭉 늘어선다

풍채 좋은 오늘의 왕초인 듯한 통통한 스님이 무대 앞쪽에서 출구 쪽으로 걸어나오신다

머리를 빡빡 민 옷은 스님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깍두기 같은 한 무리의 졸개들의 호위를 받으며 스타 연예인처럼 짱짱한 주먹처럼

폼 나고 절도 있게 신속하고 무게 있게 걸어나오신다. 이 땅엔 예수나 석가가 내다버린 부와 권세를 틀어쥔 근엄한 왕초들이 있다

그들을 안전하게 모셔야 하는

머리를 빡빡 민 옷은 스님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깍두기 같은 한 무리의 졸개들이 있다. 그 아래 슬금슬금 길을 비켜야 하는

못 중생들, 부처는 납작 엎드려 긴다

 

 


 

임희구 시인

196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방통대 국문과 졸업. 《생각과 느낌》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걸레와 찬밥』(시평사, 2004)와 『소주 한 병이 공짜』(문학의 전당, 2011) 등이 있음. 2003년 제12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현재 독거노인과 함께 사랑나누기 '걸레와찬밥'을 운영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