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서 시인 / 느티나무 하숙집
저 늙은 느티나무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팻말을 걸고 있다 한때 저 느티나무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었다 온갖 바람빨래 잔가지 많은 반찬으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수많은 길들이 흘러와 저곳에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갔다 그런데 발빠른 늑대의 시간들이 유행을 낚아채 달아나고 길 건너 유리로 된 새 빌딩이 노을도 데려가고 곁의 전봇대마저 허공의 근저당을 요구하는 요즘 하숙집 문 닫을 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지금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틱틱 끌리는 슬리퍼, 런닝구, 까딱거리는 부채, 이런 가까운 것들의 그늘하숙이나 칠 뿐
류인서 시인 / 황사
독설가인 너는 보수 일색의 이 도시를 고담시(市)라 부른다 오늘은 이 고담시에 흉흉한 황사가 떴다 배트맨의 검은 망토자락 같은 조커의 붉은 외투자락 같은 사막의 날개 갈피없이 뒤엉켜 해를 가렸다 창을 닫고 방방마다 등을 켜두었다 흔들리는 황사 스크린 위로 혼절한 태양이 떠오르고 박쥐 선글라스와 마스크에 얼굴을 묻은 사람들이 말없는 빠른 걸음으로 환란의 거리를 지나간다 종이 울린다 동굴보다 깊은 복도 저쪽에서 우- 우- 한 떼의 어여쁜 승냥이 소년들이 몰려나온다 오늘 비로소 고담시(古談市)가 고담시다워진 것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혜숙 시인(은월) / 존재감 외 4건 (0) | 2023.05.06 |
---|---|
임희구 시인 / 굳은살 외 2건 (0) | 2023.05.06 |
지관순 시인 / 혼합구역 (0) | 2023.05.05 |
김혜연 시인 / 당신을 구하는 문제 (0) | 2023.05.05 |
송진 시인 / 정중한 대화 외 1건 (0) | 202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