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숙 시인(은월) / 존재감
거반 오긴 다 왔나 봅니다 당신 발걸음이 저 어딘가 버팔로 무리 속에 내쳐 달려오듯 그 발소리에 세상이 화들짝 놀랍니다 이쪽저쪽에서 서로를 일러대는 나무와 꽃들 고자질이 시작되면 서둘러라 어서어서 누구의 관심병 앞자리가 될지 지나고 보면 다 꽃피는 때였다 잠시 동면에 들어 그 깊은 어둠 속에 잠들다 또다시 피는 날이 있다는 것만도 숨이 쉬어지는 일 지면을 들썩이는 때가 멀지 않으니 좀 더 인내하는 것 살아 있음에 할 수 있는 것 존재감 없어도 존재를 꿈꾸는 일도
-시집 <끝내 붉음에 젖다> 에서
김혜숙 시인(은월) / 배롱나무 꽃 촉수를 올려 하늘 끝에 부끄러움 걸어 둔 채 붉은 정염情炎 타 마시고 꽃술 밑에 잠든 여인 석 달 열흘 명옥헌 배롱나무 꽃 달빛에 비친 그림자 우물 속에 서성이다 저 혼자 온몸 휘어가며 스스로 적셔낸다
김혜숙 시인(은월) / 별 마당에서 누군가 쌓아 올린 별 별 별에 사람 꽃이 피고 손에 닿지 않은 곳에 누군가도 살고 옛사람의 그림자도 또렷이 박혀있다 별나라 별들 수선스러운 별 마당에 뭇별들 화르르 봄 별꽃이 한참이다
김혜숙 시인(은월) / 먼 길 바위를 겁 없이 깨며 살아왔다 마당 한 가운데 호박을 썰어 널어 말리다가 덩그러니 가슴 구멍 숭숭 내가며 시간을 푹푹 삶고 끓여대며 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미처 준비도 못한 채 뼈가 깎이고 피가 뽑히고 진을 다 빼서 내주고도 모자랐고 걸을 때마다 묻는 언어의 절름거림을 탓하면서 게으른 탓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몰두해 온 시간을 모아 온 어설픈 시간 만큼 언어의 다리는 돌돌돌 몸체를 끌고 수만 리 길을 차곡차곡 걸어왔어도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김혜숙 시인(은월) / 끝내 붉음에 젖다 만산홍엽 산과 들은 훨훨 불 지피며 흥타령 부르다 끝내는 헐거운 잇몸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웃음 흘리다 홀로 멋쩍어 외로움이 된다 깎아내린 절벽 아래 강물도 낙화를 받아내며 윗물 아랫물 온종일 바꾸며 훔쳐내고 오래지 않아 낡아 기워입었던 누더기 한 벌 헐벗은 몸에 두르고 끝줄 타고 가는 날이 저기 온다
-시집 <끝내 붉음에 젖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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