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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숙 시인(은월) / 존재감 외 4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6.

김혜숙 시인(은월) / 존재감

 

거반 오긴 다 왔나 봅니다

당신 발걸음이

저 어딘가 버팔로

무리 속에 내쳐 달려오듯

그 발소리에 세상이 화들짝 놀랍니다

이쪽저쪽에서 서로를 일러대는

나무와 꽃들 고자질이 시작되면

서둘러라 어서어서

누구의 관심병 앞자리가 될지

지나고 보면 다 꽃피는 때였다

잠시 동면에 들어 그 깊은

어둠 속에 잠들다 또다시

피는 날이 있다는 것만도

숨이 쉬어지는 일

지면을 들썩이는 때가

멀지 않으니 좀 더 인내하는 것

살아 있음에 할 수 있는 것

존재감 없어도 존재를 꿈꾸는 일도

 

-시집 <끝내 붉음에 젖다> 에서

 

 


 

 

김혜숙 시인(은월) / 배롱나무 꽃

촉수를 올려 하늘 끝에

부끄러움 걸어 둔 채

붉은 정염情炎 타 마시고

꽃술 밑에 잠든 여인

석 달 열흘 명옥헌 배롱나무 꽃

달빛에 비친 그림자 우물 속에

서성이다 저 혼자 온몸 휘어가며

스스로 적셔낸다

 

 


 

 

김혜숙 시인(은월) / 별 마당에서

누군가 쌓아 올린

별 별 별에 사람 꽃이 피고

손에 닿지 않은 곳에

누군가도 살고

옛사람의 그림자도

또렷이 박혀있다

별나라 별들

수선스러운 별 마당에

뭇별들 화르르

봄 별꽃이 한참이다

 

 


 

 

김혜숙 시인(은월) / 먼 길

바위를 겁 없이 깨며 살아왔다

마당 한 가운데 호박을 썰어 널어 말리다가

덩그러니 가슴 구멍 숭숭 내가며

시간을 푹푹 삶고 끓여대며 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미처 준비도 못한 채

뼈가 깎이고 피가 뽑히고

진을 다 빼서 내주고도 모자랐고

걸을 때마다 묻는 언어의 절름거림을

탓하면서 게으른 탓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몰두해 온 시간을 모아 온

어설픈 시간 만큼 언어의 다리는

돌돌돌 몸체를 끌고 수만 리 길을

차곡차곡 걸어왔어도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김혜숙 시인(은월) / 끝내 붉음에 젖다

만산홍엽 산과 들은

훨훨 불 지피며 흥타령 부르다

끝내는 헐거운 잇몸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웃음 흘리다

홀로 멋쩍어 외로움이 된다

깎아내린 절벽 아래 강물도

낙화를 받아내며 윗물 아랫물

온종일 바꾸며 훔쳐내고

오래지 않아 낡아 기워입었던

누더기 한 벌 헐벗은 몸에

두르고 끝줄 타고 가는 날이

저기 온다

 

-시집 <끝내 붉음에 젖다> 에서

 

 


 

김혜숙 시인(은월)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대시인협회' 간사, '서울문학 문인회' 이사, '우리시' 회원, '시가 흐르는 서울 낭송회' 이사, 현대시인협회 간사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