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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해돈 시인 / 생략법 외 2건

by 파스칼바이런 2023. 5. 6.

최해돈 시인 / 생략법

 

 

그것은,

 

다 타지 않은 한 장의 사각형 종이다

겨울의 틈에 잘 스며든 한 웅큼의 빛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3박자 호흡이다

 

바람이 갈라진다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먼지가 온종일 흩날린다

먼지가, 어제의 방을 찾아 출렁인다

 

그들이 오고 있다

 

먼데서

이곳으로

 

주머니에 푸른 잎을 넣어 달려오고 있다

빠른 걸음으로 새벽을 지나,넉넉한 오후로 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는, 미완의 잠을 다독여야 할 시간

 

우리의 몸은 떨고 있다

우리의 생각은 마른 풀처럼 흔들리고 있다

 

다시, 어둠이 가까워질수록

 

여기는 기쁨과 슬픔의 질량이 잘 엮이는 시간

어제와 오늘의 지워지지 않은 글씨들이 선명하게 얼굴을 씻어야 할 시간

내일의 바닷가 모래를 손바닥으로 비벼야 할 시간

 

 


 

 

최해돈 시인 / 물방울

 

 

 비 오는 날, 물방울, 물방울, 보도블록 위에 외출 나온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이 톡톡 튕긴다. 물방울이 걸어온다. 걸어오면서 울고 있다. 울고 있는 물방울 옆에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이 외출 나온 보도블록 위에 고요가 한 켤레 두 켤레 쌓인다. 그 고요 위에 물방울이 깨알처럼 쏟아진다. 이쪽에도 물방울. 저쪽에도 물방울.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고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난다. 물방울과 물방울이 서로 부딪힌다. 물방울이 웃는다. 물방울이 물방울의 길을 간다. 보도블록 위는 온통 물방울 나라. 여기도 물방울, 저기도 물방울. 여기저기에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을 바라보는 마음 한쪽에 물방울이 여러 개 생긴다. 무늬가 없다. 다만 깊어 간다. 물방울을 꺼내어 물방울 옆에 놓는다. 물방울이 굴러간다. 데굴데굴 굴러간다. 물방울이 물방울과 물방울의 틈을 지나간다. 틈을 지나가는 큰 물방울, 작은 물방울. 물방울이 아프다. 통, 통, 통, 물방울이 굴러간다. 물방울을 따라 나도 굴러간다. 시간을 깎으며 가는 저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위에 내려앉는 숨결들. 숨결들이 눈을 씻는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든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두 눈을 크게 뜬 물방울. 물방울. 물방울.

 

 


 

 

최해돈 시인 / 늙은 운동화

 

 

처음엔 탱탱했지만 흐르는 시간을 꺾을 순 없었다. 그 주위엔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흩어진 먼지가 알을 낳으려 할 때 세상은 불협화음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어깨 위에 잃어버린 기억들이 바람을 타고 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세상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휘어져 가는 몸통을 바라보는 것일 뿐

 

긴 生을 끌고 온 손등이 쭈글쭈글했다. 먼 길을 달려온 잔털들이 아프다. 바깥으로 흩어졌던 빛과 뼈들이 집중한다. 어둠 속으로 달려가던 조각들이 시간의 수평선 위에 다시 모였다

 

어둠이 빛을 발산한다

 

 


 

최해돈 시인

1968년 충북 충주 출생. 2010년 《문학과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현대시학』으로 작품활동. 시집으로 『밤에 온 편지』 『기다림으로 따스했던 우리는 가고』 『아침 6시 45분』 『일요일의 문장들』 『붉은 벽돌』이 있음. 황금찬문학상 수상. 충북문화재단 및 2016년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