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룡 시인 / 도서관에서
지식의 배설물들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쌓아놓으니 참 두엄자리 장관이로다 이 거름 뿌리면 저 수많은 두뇌의 화초들 이파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리니 복사실에선 지식을 태우는 연기가 스모그를 이루고 사람들은 스모그 속에서 의식의 사리를 줍는다
계통적으로 정리된 나무의 납골당에서 진시황이 불태운 책 한 권을 꺼내드니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의 시체가 시커멓다 얇은 종이관에 안치된 시체들에게 소중히 경배하면서 우리는 제사장에게 우리들의 이름 한 점씩을 떼어주고 시체들이 제공하는 언제나 날것인 죽은 회를 음복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새로운 제사법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썩어가노라
달마는 지혜의 해골을 혜가에게 건네주고 혜가는 승찬에게 건네주고 승찬은 도신에게 건네주고 도신은 홍인에게 건네주고 홍인은 혜능에게 그 해골 건네주니 지혜 또한 썩고 또 썩어 다시 똥이 되는데
그 똥 먹기 위해 이렇듯 북새통을 이루니 똥을 퍼주는 배식원들은 자꾸만 불친절해지고 오줌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 위해 배고픈 사람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똥독을 소중히 받아 안는다 아 그 거름 모래비처럼 세상에 쏟아질 날 입 벌리고 기다리노라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새로운 고행법이다
나무의 시체를 먹고 또 먹어 나의 뱃속에 도서관만한 나무 한 그루 뿌리내릴 때까지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에게서 나와 나를 낳고 먼저 죽어야 할 나의 고기로 회를 쳐먹는 시간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헛된 식욕을 위해 시간의 목탁을 두들기며 탁발하는
* 마태복음 1장 2~4절
-시집 <나무 물고기>에서
차창룡 시인 /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 오늘은 비를 만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싯다르타의 사랑의 체험담이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고백이 없었다면 내 시는 이 말을 하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다니 그 사람 분명 존재하거늘 사랑을 잃다니 사랑이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비 오는 밤 고속버스를 타고 창밖을 불빛 타오르는 저, 불빛 거미줄이 동여매고 있네
불빛을 향해 나방이 모여드는 한 불빛에는 거미줄이 걸리네 비 오는 밤, 물방울 맺힌 충혈된 눈아, 빛을 누지 마라
모든 빛은 거미줄을 배설하므로 거미줄에 걸린다 나방이여, 없는 거미줄에 걸리지 사랑을 잃다니
-시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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